판단중지, 에포케(epoche)
판단중지, 에포케(epoche)
  •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 승인 2019.08.2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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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사람은 누구나 두 마리의 개(犬)를 키운다고 한다. 그 개의 이름은 선입견과 편견이란다. 이 선입견과 편견이 생기는 이유는 각자가 `내 생각은 객관적이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객관적이라는 거,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참외는 노란색이다'라고 했을 때 내가 보는 참외의 노란색과 옆 동료가 보는 참외의 노란색이 같은 색이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 E. Husserl·1859-1938)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은 실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즉 `주관적인 나의 의식 가운데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물의 본질은 현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것이 후설의 현상학 이론이다.

눈앞에 컵이 놓여 있다. 단순한 물체로서의 컵은 나의 의식 세계의 컵으로 변한다. 컵이라는 정보가 내 의식의 그릇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컵을 보고 있을 때의 내 의식 자체가 컵이다. 선물 받은 컵, 선물해준 사람, 그 사람과의 관계 등 내 의식이 지향하는 것들이 컵에 대한 의미로 바뀐다.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그 컵의 본질은 현상적으로 놓여있는 그것이 아니라 내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그것이다.

흔히 우리는 자신의 주장을 펴나갈 때 `객관적으로 봐서,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순수한 객관성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주관적이다. 자신의 객관성을 과신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떨까.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 어떤 사태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자신의 생각뿐이라고 믿는 사람, 문제의 원인은 늘 타인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 어떤 사태에 대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절대 명제를 들이대는 사람, 그리고 결코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물론 타인의 삶도 그렇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이에 후설은 `에포케(epoche

)'를 외쳤다. 에포케는 고대 그리스어로 `정지, 중지, 보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현상학에서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급하게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의 근원이 될 수 있다. 판단하는 사람에 따라 그 입장, 상태, 조건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도 가장 좋다거나 나쁘다는, 또는 옳다거나 그르다는 판단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무엇에 대해서든 판단을 유보하여야 한다. 이렇게 판단을 중지 혹은 유보했을 때 타인이 보이고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사유가 나의 삶을 완벽하게 지배하기 쉬운 환경에 살고 있다. 네트워크와 스마트 미디어의 등의 발달로 개개인은 타인과의 접속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살아간다. 인터넷, SNS, 신문, 방송 등을 통해 타인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객관과 주관, 현상과 본질을 구별하지 못하고 살아가기 쉽다.

하여 지금은 `에포케'를 외칠 시기다. 잠시 자신의 주관을 멈추고 서로의 주관이 만나 공통된 영역을 확인하고 의견을 조율해 나가야 한다. 에포케를 통해 첨예한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토론이 꽃피울 수 있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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