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향기
그날의 향기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9.08.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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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새벽녘인 것 같다. 요란한 벨 소리에 더듬더듬 휴대폰을 끈다. 훤하게 동트지만 내겐 이른 아침이다. 저녁형인간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날도 새벽녘부터 꿈인 듯 생시인 듯 소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전화벨, 친정아버지셨다. 옥수수가 잘 영글어 택배로 보내주신다는 말씀이시다.

쫀득쫀득 차지고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옥수수, 먹기가 쉽지 옥수수재배는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본시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는 것처럼 옥수수도 손이 간만큼 표시나 게 자란다. 밑 등에서 삐죽하게 올라오는 옆 순, 순치기를 몇 차례 해 주어야 반듯하게 한 대공만 자라고 실한 옥수수수확을 할 수 있다. 만만치 않은 옥수수농사, 수확하려면 다른 인건비에 웃돈을 주어야 인부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억센 옥수수이파리에 얼굴은 물론 긴 팔을 입어도 팔뚝을 베이고 모기도 많아 모두가 꺼리는 작업이다.

뻣뻣한 옥수수이파리가 서로 겹쳐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밭고랑을 덮고 있으면 정글 숲을 헤집고 다니듯 옥수수 수확을 한다. 모자를 쓰고도 머리카락은 이파리에 스치고 스쳐 옥수수수염처럼 서로 엉켜 부스스해지고 엉망이다. 그런 옥수수를 보내주신다고 하시니 괜스레 무거운 추를 마음에 단 양 불편하다.

몇 해 전, 남성용 의류 이월상품을 뒤적이며 아버지의 셔츠를 골랐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나 자신의 옷은 브랜드를 따져가며 디자인과 색상에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며 쇼핑을 했는데, 아버지의 셔츠는 가격을 따져가며 이월상품 매대에서 고르는 나다.

디자인보다 사이즈가 먼저고 품질보다 가격이 우선이었다. 고르고 골라 비닐 백에 담아오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거실탁자 위에 커다란 종이 백과 비닐 백이 나란히 있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나의 옷이 전부였다. 다음날 다림질을 하면서 그때야 아버지를 홀대 아닌 홀대를 한 것에 가슴이 쿵 내려앉아 먼 곳을 응시했다.

눈에서 책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도 머리 허연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아버지는 애면글면 늘 자식 걱정이시다. 오죽하면 팔십 노모가 육십 아들에게 차 조심하라고 이를까. 옥수수 하나, 하나 따시면서 얼마나 딸들의 얼굴을 그렸을까. 그깟 원피스가 뭐라고 상가를 몇 번을 돌았으면서도, 이월상품을 고르고 있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돌이켜볼 때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아버지의 셔츠 한 장을 사면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때때로 먹먹하다. 성미가 깐깐하고 고집이 센 반듯한 자세는 이미 찾아보기 어렵고 점점 어깨, 허리가 구부러지고 계신다. 쩌렁쩌렁하고 시원스레 강인한 발음 또한 어눌해지고 힘이 약해지신 아버지. 그렇게 노구의 몸은 점점 누렇게 변한 빛바랜 한지처럼 세월을 짊어지고 가는 세월을 붙잡고 계셨다.

그날 오후, 고요해진 사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아픈 그림자는 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자꾸만 따라온다. 나도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초로의 나이이면서 아버지의 편리성과 패션 감각을 무시하고 머리로 먼저 계산을 했던 내 모습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딸들을 집으로 부르거나 딸네 집에 오셔서 주무시고 가셔도 되건만 혹여나 폐를 끼칠까 택배를 고수하시는 아버지시다. 실하고 튼튼한 옥수수를 자식이 뭔지 딸네 집으로 먼저 보내시고 정작 당신은 파치옥수수만 드시고 계실게 자명하다.

화엄경 말씀에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했다. 양손 가득 나만을 위한 욕심을 가득 들고 일방통행을 하는 나, 여전히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부모는 그런가 보다. 밑거름과 웃거름으로 실하게 자란 옥수수가 버팀 뿌리로 꽉 움켜잡아 비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울타리 같은 부모님은 오늘도 버팀 뿌리처럼 자식을 꼭 품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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