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의 밤
병실의 밤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19.08.2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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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어깨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이미 먼저 입원해 계시는 칠, 팔십 대 할머니 세 분이 계셨는데 모두 내게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내왔다. 그분들의 궁금증은 멀쩡해 보이는데 왜 입원을 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새댁은 왜 입원했어?” 하셔서 병실에 젊은 새댁이 있나 하고 둘러보았으나 그건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어깨가 아파서 입원했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신다. 이 나이에 새댁 소리를 듣다니. 그 외에도 몇 가지 질문들을 하시더니 음료수, 과일, 옥수수 등을 주시며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고 권하셨다.

병실에서의 밤은 길다. 10시도 안 됐는데 취침 분위기이다. 기력이 떨어져 입원했다는 정선에서 오신 k할머니 말씀이 없으시고 조용한 분이다. 그 옆 침대에는 농사일하다 허리 통증으로 입원하셨다는 b할머니 허리디스크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란히 누운 옆 침대 k할머니를 붙들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무용담 같은 이야기다. 젊은 시절 여자 몸으로 하루에 여섯 짐씩 나무를 해왔단다. 그것도 웬만한 남정네보다 당차게 나뭇지게를 졌었노라 회상하셨다. 팔순이 가까운 지금도 농작물을 기르고, 팔고 영감님보다 본인이 다 알아서 농사를 지으신다는 이야기였다. k할머니는 가끔 “네”, “네”라고만 답할 뿐이었다.

봇물이 터진 듯했다. 평생 살면서 들어줄 상대가 없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들일까. 말이 없는 영감님에 대한 섭섭했던 이야기를 끊임없이 털어놓았다. 평생 자식 낳고 살아온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불과 얼굴 본지 하루도 안 된 생판 모르는 타인이었던 병실 사람들에게 아니, k할머니에게 털어놓으셨다.

지난주 입원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직장일과 바쁜 이런저런 일정들 때문에 약 처방만 받아 집으로 왔다가 한 주일 후에 다시 병원을 찾은 터이다. `그래,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이참에 좀 쉬면서 어깨치료 좀 제대로 받아보자'했는데 잠을 들일 수가 없었다. 여름 감기마저 걸려 가끔 기침을 하자, 할머니들은 “새댁이 감기 걸렸으니 에어컨을 끄자”고 하셔서 괜찮다고 했지만 세 분 할머니 성화에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불을 끄고 누운 병실에는 b할머니의 휴먼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고 밤이 깊을수록 그분의 삶의 모습들이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읽히기 시작했다. 평생 열심히 일해 전답도 장만하고 지금은 살만한데 영감님의 다정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해 늘 가슴에 찬바람이 인다고 했다. b할머니의 그 말이 내게도 전이가 되었다. 깊은 밤 병실은 할머니의 안식처이자 마음을 정화시키는 고해소인 듯했다.

병실의 새벽은 더 빨리 온다. 좀 더 잠을 청해보려 했으나 할머니들은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은 듯 어느새 친구처럼 가까워지셨다. b할머니도 쌓여 있던 가슴속에 말들을 다 쏟아내서인지 전날보다 얼굴이 밝아지셨다. 그 할머니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은 입원실의 캄캄한 어둠과 말수 적은 정선에서 오신 k할머니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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