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정칠월 건들팔월
어정칠월 건들팔월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2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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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요 며칠 새벽안개가 잦다. 반바지를 입은 아랫도리가 서늘하고, 밤새 틀어놓았던 선풍기 바람은 어느새 불편한 새벽녘을 만들고 있다.

옅은 안개에 가려 흐릿한 새벽달을 걸친 아파트 신축공사장 타워클레인을 보면서 막무가내로 더 높은 곳, 더 좋은 곳으로만 오르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욕망을 생각한다.



胡孫投江月(호손투강월) 강 속의 달을 지팡이로 툭 치니
波動影凌亂(파동영능란) 물결 따라 달 그림자 조각조각 일렁이네
飜疑月破碎(번의월파쇄) 어라, 달이 다 부서져 버렸나?
引臂聊戱玩(인비료희완) 팔을 뻗어 달 조각 만져보려 하였네
水月性本空(수월성본공) 물에 비친 달은 본디 비어 있는 달이라
笑爾起幻觀(소이기환관) 우습다. 너는 지금 헛것을 보는 게야
波定月應圓(파정월응원) 물결 가라앉으면 달은 다시 둥글 거고
爾亦疑思斷(이역의사단) 품었던 네 의심도 저절로 없어지리.
長嘯天宇寬(장소천우관) 한줄기 휘파람 소리에 하늘은 드넓은데
松偃老龍幹(송언노룡간) 소나무 늙은 등걸 비스듬히 누워 있네

- 강희맹 <作墨戱題其額 贈 姜國鈞(작묵희제기액 증 강국균)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시 한 수 적어 강국균에게 주다> 전문.

더워 못 살겠다던 아우성이 어느 사이 부질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태풍이 몰려온다고 호들갑이고,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조바심을 내던 일도 희미하다.

시냇물은 한여름에 비해 소리마저 낮추면서 훨씬 더디게 흐르고, 뭉게구름 무럭무럭 키워가는 하늘은 훨씬 높고 푸르다.

애절한 능소화는 꽃 덩어리로 채 무너져 내려 여름을 한탄하고 광복절이 지나면서 무궁화 꽃잎들도 제 몸을 말아 지상으로 가라앉는다.

계절은 여지없이 흐르면서 처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입추와 말복, 백중이 지난 지금은 어쩌면 일 년 가운데 가장 한가로운 시간. 씨 뿌리고 논밭 갈며 피땀으로 온 계절을 보냈던 노동의 고단함을 뒤로하고, 아낙네들은 옷가지를 내다 널며, 여름 습기에 눅눅해진 책을 말리면서 일상과 사물, 그리고 마음까지도 서늘하게 식히는 계절이다.

새벽길을 걷던 어느 날. 충전이 덜 된 휴대전화를 가져오는 바람에 <국악의 향기>와 멀어지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이어폰을 빼는 순간 들려오는 갖가지 풀벌레 소리. 아! 미물인 곤충들도 저처럼 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새벽어둠을 마다하지 않고 몸을 비벼 스스로를 돋보이려 하는데, 그 소리가 사뭇 장엄하게 느껴지는 건 아직은 크게 서럽거나 외롭지 않다는 울림이겠다.

한여름을 거쳐 입추와 처서, 백로로 이어지는 가을맞이 절기의 흐름을 옛 사람들은 `어정칠월 건들팔월'로 불러왔다. 끝 치례 농사일이 남아 있는 칠월을 그나마 어정거리며 지내고, 제 할 일을 모두 마친 호미마저 말끔히 씻어 놓은 팔월은 건들거리며 한가롭게 보내는, 지금이 딱 그 시절이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은 현대인들의 생활상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모처럼 긴 여름휴가를 마치고 휴가의 여운을 천천히 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다가올 추석을 준비하며 사야 할 것들의 구매를 늦추고 있으니 여러모로 한가한 시간들이다. 살다 보면 가끔씩은 번잡하고 고단한 일상을 아무 생각 없이 뒤로 미루고 그저 복잡한 머릿속과 쫓기듯 찌든 마음을 텅텅 비우고 싶을 때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비움을 일부러 의식하며 가만히 혼자 앉아 온전한 혼자의 상태로 나를 되돌리는 일은 아마도 `어정칠월 건들팔월'에 해당되는 지금이 딱 제철이다.

어차피 폭염은 가고 가을은 오고야 말 일. 그런데 그 가을은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 낭군의 애를 끊으려고 귀뚜라미가 톱을 가져오는'<김영조 저. 하루하루가 잔치로세. 인물과 사상사>계절.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는 처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심술궂은 태풍은 한두 차례 우리를 엄습할 것이니, 지극한 외로움을 사절할 것. 다만 하늘의 달과 물에 비친 달은 구별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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