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화양연화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8.2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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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한낮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소리만으로도 행정안전부에서 보내온 재난문자인 걸 알 수 있다. 폭염경보다. 야외로의 외출이나 일을 자제하라는 주의문자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사무실 안에서는 밖의 온도를 어림하지 못하다가도 이 문자로 얼마나 더운지 짐작이 간다.

저녁에는 더위가 수그러들어 걸을만하다. 웬만하면 퇴근 후에 한 시간씩 걷자고 나와 약속을 했다. 장마가 지나간 뒤라서 더우면서도 습기가 많은 날이다. 걷다 보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이런 하늘에 매번 홀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다가 시커먼 벌레 떼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행렬이다.

하루살이가 아닐까 하여 한참 눈 초점을 맞춘다. 가만히 살펴보니 개미군단이다. 개미가 애달픈 혼인비행을 떠나고 있다. 비행은 먼저 하늘을 향해 나는 공주개미의 뒤를 따라 수많은 수개미가 따라 오른다. 이중 단 한 마리만이 선택의 영광이 주어진다. 짝짓기가 끝나면 자기의 생명이 끝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장 강한 짝을 찾기 위해 더 높이 날아가는 공주개미의 뒤를 죽기 살기로 따라가는 듯 보인다.

목숨을 건 비행은 30분간 계속된다. 1억 년 전부터 치러져 온 신성한 의식. 힘이 다 빠지도록 전력질주 끝에 이루어지는 사랑.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황홀한 절정을 느낀다. 곡진한 전율이다. 곧 공주개미는 여왕개미로 탈바꿈한다. 그러면 수개미들은 공중에서 무더기로 떨어져 죽는다.

처음 보는 광경이 경이롭다. 개미의 이런 슬픈 사랑을 어려서 알았다면 폭군은 되지 않았을 텐데. 시골에서 자라서 개미를 많이 보았다. 터울이 지는 오빠만 셋인 나로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일찍 학교에서 돌아와 삯일을 간 엄마를 기다리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다 심심하던 차에 나란히 줄을 지어가는 개미떼를 만나면 거기에 푹 빠져 시간을 보냈다.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마냥 뒤를 쫓아도 알 수 없는 미궁 속이다.

외롭던 아이는 여럿이 늘어서 가는 개미들이 부러웠다. 친구들과 소풍을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바쁜 일이 있어 서둘러가는 모습 같기도 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심술이 나면 개밋둑을 손으로 부수고 무리를 흐트러뜨렸다. 개미가 어디로 갈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게 재미있어 웃었다.

아마도 앞서 간 개미가 뿌려놓은 냄새를 따라가느라 한 줄로 늘어서 가는 개미에겐 내가 포악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행렬을 건드려 놓았으니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어쩌다 어른들로부터 개미가 이동하면 비가 온다는 말을 들었다. 소풍 가는 전날에 이런 모습을 목격하면 어김없이 난폭을 부렸다. 혹시라도 못 가게 될까 봐 억지로 개미들을 해산시켜버리곤 했다.

공주개미는 평생 오직 한 번의 비행을 위해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또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해 날개를 키운다. 그리하여 비행으로 나눈 사랑으로 평생을 견디며 살아간다. 수개미는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헌사(獻思)인가. 공주개미와의 찰나의 사랑을 위하여 수많은 수와 경쟁한다. 그러다 아찔한 순간이 지나가면 모두 생을 마감한다. 슬프고도 고귀한 사랑이다.

오늘은 개미의 일생에 생각이 쏠린다. 사람의 잣대에 놓고 보면 불행하고 슬프기 짝이 없다. 미물의 목숨을 건 비상이 부럽다. 어쩌면 그들에겐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인 화양연화(花樣年華)일지도 모른다.

긴 여름날의 지독한 햇볕을 버텨 이제야 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한 내 인생. 조금씩 익어가노라면 나에게도 번득 화양연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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