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자무수 4
호자무수 4
  •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 승인 2019.08.1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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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상인의 맑고 깨끗한 마음은
만 리로 뻗은 강 위의 달이로구나!
밤늦도록 능가경을 읽노라면
잔나비들 책상 밑 밤을 훔치겠지.

반갑습니다. 무문관 공안으로 보는 자유로운 선의 세계로 여러분과 함께하는 괴산 청천면 지경리 청운사 여여선원 무각입니다. 제가 상주하고 있는 산골 초암에는 새하얀 백일홍 꽃이 여전히 한창인데요.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무문관 제4칙 호자무수(胡子無鬚) 4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공안은 달마대사에게 수염이 없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항상 덥수룩한 수염의 달마대사는 어찌하여 수염이 없을까요? 참으로 말길이 끊어져서 사량 분별이 들어설 틈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는 수염이 있다고 해도 걸림이 되고 또한 없다고 해도 걸림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1921~2006)과 같은 일본의 선불교 학자들도 역사적 달마와 전설적 달마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의 전설적 아이콘이 되어버린 달마선사에 대해 선사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선사들은 아이콘화되어버린 달마를 해체하려고 했을 겁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도 죽여야(逢佛殺佛 逢祖殺祖) 스스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우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우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운문(雲門:~949)선사도 부처를 `마른 똥 막대기'라는 폭언을 날리며 우상 파괴에 열을 올렸던 것이지요. 부처마저도 주인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마른 똥 막대기 취급을 하는데 달마선사도 예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걸림이라는 것은 진성(眞性)의 자유와 위배되는 것인데요. 없다는 말에 걸리게 된다면 애시당초 없다는 전제를 무시하고 마는 격이 되는 것이니 이 또한 모순이 아닐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에는 있고 없음에 끄달리지 말고 다가오는 경계를 초월해서 가라는 노파심절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힘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선이지요. 선은 학문이 아니고 실제적 수행이며 실참인 것이니 실참함으로써 실오가 있게 되는 것이고 실오의 자리가 본래의 마음자리입니다. 상대적인 분별과 대립이 쉰 곳에는 버려야 할 망념도 돌아가야 할 진성도 없다는 건데요. 늦깎이로 출가한 육조혜능 선사는 신수 스님이 게송으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 앉고 때 묻지 않도록 하라고 하자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 앉고 때가 끼겠는가? 라고 답하면서 근원적인 가르침을 제시해 스승인 홍인 스님에게 법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래의 성품은 마치 티끌 없는 하늘과 같아서 그 어떤 망상의 구름에도 초연할 뿐이라는 말이지요. 달마대사의 진신은 무상이며 유(有). 무(無)의 차별에 떨어진 무상이 아닌 즉 유·무를 초월하면서도 유·무를 포용하는 실상으로서의 무상을 말하는데요. 이 무상의 달마대사를 친견하는 자리는 능견과 소견이 하나 되는 곳으로 참된 친견이란 자신이 그렇게 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직접 확인해 보아서 추호의 의심이 없으면 이것이 달마대사의 본래 면목과 계합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때에야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요. 달마대사는 왜 수염이 없는가? 에 대해서를 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무문관 제5칙 향엄상수(香嚴上樹)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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