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포로 감시원에서 독립투사가 된 안승갑 선생을 생각하며
조선인 포로 감시원에서 독립투사가 된 안승갑 선생을 생각하며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8.1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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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청주시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행정구역 현도면에 행정타운이 있다. 이곳 행정타운에 현도복지회관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마당에 안승갑 선생의 공적을 적은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4면의 비석에 선생의 공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효행을 근본으로 “이 순간을 참되고 복되게 살자”는 좌우명과 몸소 나라와 고향을 사랑하고 실천한 선각자로서 지역민들의 건강과 지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 있다.

안승만 선생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던 1944년 말 조국에서 수천㎞ 떨어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조선인 청년 10여명과 함께 `고려독립청년단'이라는 항일운동단체를 결성했던 독립투사였다. 안승갑(1922~1987) 선생을 포함한 이 단체 회원들은 일본군 소속 포로 감시원이라는 특이한 신분이었다. 1942년에 3000명이 넘는 20~35세인 조선의 젊은이들이 2년 계약직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지원했다. `지원'이라는 형식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강제징용'에 가까운 것이었다.

안승갑 선생은 부강공립보통학교 재학 시 친구 김상희의 집에서 그 동네 항일운동가에게 영향을 받아 현도면 죽전리에서 소년단과 청년단을 조직해 야학을 개설하여 한글 보급 운동과 농촌계몽 및 민족의식 보급 운동을 했다.

졸업한 후에는 음성군 금왕면사무소 산업계로 발령받았다. 이때 요시찰 인물로 고등계 형사가 쫓고 있던 무극리 장기형씨와 접선한 것이 발각돼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강요받았다.

안승갑은 일본군에 입대하는 것보다는 포로감시를 하는 군속으로 지원해 1942년 6월 부산 서면에서 조선인 군속 3100여명과 2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군속들은 배를 타고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으로 파견돼 일본군에게 패해 잡혀 있던 연합군 포로 감시 업무를 맡았다. 선생은 일본 점령 아래 있던 인도네시아 자바섬 반둥시 일본 제16군 포로수용소에서 연합군 포로감시 일을 시작했다.

일본군으로부터 극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인근 국가인 필리핀과 미얀마의 독립 선포에 고무돼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1945년 1월 자바섬 동부 암바라와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내고 3명의 투사들이 장렬히 자결한 일도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지만 안승만 선생을 비롯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1년 반이 넘도록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군'으로 취급돼 연합군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일부는 B·C급 전범으로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안승만 선생은 절망하지 않고 자치조직인 `조선인민회'의 지부장을 맡아 당시 자바섬에 있던 조선인 인명부, 자바섬의 조선인 일본군 군속들이 일본의 강요로 저축한 예금 내용을 적은 `사금회수증명서'등의 자료를 남겼다.

1947년 2월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온 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체불 임금과 위로금 배상 청구 운동을 벌이는 한편 고려독립청년단 활동가들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독한 일제 35년의 식민지 생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조국의 광복은 이루어졌다. 그것은 조선인으로서 일본군의 군무원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고려독립청년단을 조직해 목숨을 걸고 항일독립투쟁을 했던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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