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접고
날개를 접고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9.08.1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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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기억은 새겨진다. 눈에 삼삼하고 귀에 자욱하다. 세월이 흐른 만큼 묻어둔 사연들이 입에 어리대도 말로는 다 할 수 없어 글을 쓴다.

팔십 대 초반인 그분은 지나온 삶을 기록하고 싶다며 첨삭을 받기 위해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새로 만난 아내는 현재 겪고 있는 일들을 써오고 남편은 남달랐던 과거를 날것 그대로 끌어오고 있다.

호기로 넘치던 생의 한 때, 쇠도 녹일 뜨거움으로 남미대륙을 떠돌았다. 이젠 젊은 날의 팽팽하던 힘줄과 근육은 잠들었다. 먼 구름을 따라나서던 먼 길의 손짓들도 수그러들었다. 엘도라도는 신기루였는가. 삶이 망가진 사람은 고향을 떠나고 아주 더 망가진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 오 듯 모질게 시달리면서도 강인했던 한 남자가 신병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추억보다 아픈 기억만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국, 접어두었던 사연을 펼치며 마침내 수십 년 전 어린 자신과 재회하며 설움에 겹다.

비극은 태생부터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태기가 없었던 어머니가 소박을 당하고 나서야 임신사실을 알고 아들을 낳아 시가로 갔지만 끝내 받아주질 않더란다. 생계가 막막했던 어머니는 생부의 존재를 모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재가했다. 첫 결혼에서 쉽게 얻지 못했던 한을 풀듯 자식을 줄줄이 낳았다. 생활력이 없던 의붓아버지는 아내가 데리고 온 자식을 나 몰라라 했다. 어린 몸으로 육이오전쟁을 겪으며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도 부모에게 말하지 못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상처를 끌어안고 홀로 견뎌야 했던 작은아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배고픔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쫄쫄 굶는 애옥한 삶을 살아보지 않고 어찌 배부름의 고마움을 알겠는가. 전쟁 이후 태어난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계셨고 배가 고팠던 기억이 없다. 또래와 싸우고 울고 들어오면 시시비비를 가릴 사이 없이 할머니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얼굴에 작은 상처만 나도 흉이 남을까 야단부터 치던 어머니를 조용조용 말리던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표정,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건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는 뜻일 거고 어린 날이 생애의 유토피아로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분은 독학으로 기술을 배워 살길을 찾아야 했단다. 나직하게 태어났지만 높은 곳을 바라보려 노력했던 청년은 항공정비사가 되어 선택한 곳이 꿈의 나라 미국이었다. 그곳에서 숨이 차도록 내달렸다. 쓰디쓴 지난날을 보상이라도 하듯 황금이 쏟아졌다. 미국에서, 아르헨티나에서 많은 돈도 벌었다. 따뜻한 가족의 정을 모르고 성장했던 그분에게 아내와 자식이라는 가족은 기쁨이자 또 다른 멍에였다. 그들은 가장의 뼈아픈 과거를 이해하고 함께 공유하지 않았다.

상처 난 날개를 접은 지금 그분에게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젊음도 재물도 가족도 손에 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어린 시절처럼 내 편은 없고 병든 몸속에 잠들었던 눈물겨운 기억들만 모두 일어나 통곡하게 한다. 빈 몸으로 삶을 정리하는 문장은 눈물이 절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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