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에서 찾은 증평 역사의 뿌리
땅속에서 찾은 증평 역사의 뿌리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08.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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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구석기시대는 인류문화의 가장 원초적인 단계로서 기술발전 단계상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를 사용하던 시대로 약 250만 년 전부터 1만 2천 년 전까지를 가리킨다. 이 용어는 1865년 영국학자 J.Lubbok이 선사시대를 4시기-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구분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인류역사의 첫 번째 단계이며 인류문명의 여명기에 해당한다.

고고학에서는 오랜 과거로부터 남겨진 물건들을 물질문화라고 하는데, 이는 과거 인간활동의 유형적 잔존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 이런 증거는 현재까지 잔존한 과거 인간활동과 관련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를 통해 과거 인간행위와 그들이 증거를 남겼을 때의 자연환경을 복원하여 인류역사를 재구성한다.

증평군은 우리나라에서 울릉군 다음으로 작은 군에 해당한다. 2003년에 증평군이 개청 되었으니 군의 역사도 짧다. 짧은 군의 역사만큼 충청북도의 12개 시군 중 증평군은 유일하게 구석기유적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증평군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처음 발굴됨으로써 구석기시대부터 인간활동이 있어 왔음이 밝혀졌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역사를 땅속에서 발견한 것이며, 증평의 역사가 구석기시대부터 이어져 왔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증평 사곡리 유적이다.

사곡리 유적은 미호천 지류인 보강천과 삼기천 두물머리 언저리의 저구릉선 산지의 사면 말단부와 완만한 계곡부에 자리한다. 저구릉성 산지와 소하천이 발달하여 있고, 하천 주변으로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어 선사시대 이래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미호천유역에 분포한 구석기유적들과 입지환경상 공통성이 있다. 이런 입지환경에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사곡리유적의 발굴결과 3개의 유물층이 찾아졌다. 중심 유물층은 적갈색 고토양층에 형성된 2유물층이다. 출토된 구석기 유물은 주먹도끼, 여러면석기, 찍게 등 대형석기가 많고 긁개, 밀게, 찌르게 등 잔손질 석기가 적은 편이며, 몸돌과 격지 등 모두 296점이다. 사용된 암질은 석영, 규암이 대부분으로 유적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로 암질획득이 매우 경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기제작행위를 알 수 있는 짝이 맞는 유물과 망치돌 등은 확인되지 않아 이곳이 제작지보다는 소비지로서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유물은 사면 하단부에 집중되거나 열을 이루어 분포하며, 퇴적물의 구성과 양상으로 볼 때 석기의 제작과 사용, 폐기 이후에 퇴적층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단기간에 걸쳐 이동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석기구성과 퇴적양상은 진천 송두리유적, 양평 도곡리유적, 김포 장기지구 등에 분포하는 구석기유적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이들 유적의 석기제작시기는 제작수법, 연대측정, 퇴적층분석 등으로 볼 때 5만 년 이전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증평 사곡리 유적은 적어도 5만 년 이전의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인간활동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증평 역사의 뿌리를 찾은 셈이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면 위로 고려~조선시대 사람들의 주거지와 무덤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에서 사람들의 삶이 단절 없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곳은 꽃동산으로 바뀌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질 것이다. 이 유적 발굴조사 중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홍성열 증평군수의 유적 방문이었다. 40여 년간의 고고학 유적 발굴 중 기초단체장이 사전약속 없이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유적 현장을 살펴보고 구석기유물 한 점 한 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살펴본 후 출토유물을 활용하여 증평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밝히었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유물은 발견보다는 활용이 중요하다. 시민과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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