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더위 속 내리 추억
여름, 더위 속 내리 추억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19.08.06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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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주말 오후 시골에 계신 친정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날이 더워 텃밭의 채소들이 모두 시들었단다. 아침저녁으로 수돗물에 호스를 연결해 연신 물을 뿌려도 그때뿐이라며 한숨이시다. 폭염의 그림자는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지난해와 별반 다름없이 올 한해도 많은 이의 달갑지 않은 화두로 남을 것 같다. 반면 반가운 소식도 있다. 여름철 단골 불청객인 모기가 눈에 띌 정도로 사라졌다니 한 번만 물려도 퉁퉁 붓고 며칠은 지나야 진정의 기미를 보이던 나에게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년 시절 엄마는 더위를 피해 늘 마당 평상에 저녁상을 차렸다. 텃밭에서 캔 감자를 찌고 갓 따온 옥수수를 삶고 직접 밀가루를 반죽하고 밀어 냉국수를 요리해 식구들을 불러 앉혔다. 조금은 부족한 듯 조촐한 찬이었지만 가족들은 옹기종기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서산의 해를 배웅했다. 그렇게 여름 한 철 마당 텃밭에 조금씩 심어놓은 먹거리들이 더위 속에서 알차게 여물어 가듯 자식들은 엄마의 담백하고 소박한 손맛에 더위를 이겨냈다.

저녁상이 차려지는 동안 아버지는 어둑한 마당 한 켠에 모깃불을 피웠다. 재료는 시골집 근처에서 흔하게 많이 자라는 온갖 쑥이었다. 가까운 상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모기약이 있었지만, 가족들 인체에 해롭다는 이유를 들었다. 바짝 마른 잡풀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금방 베어 온 쑥 더미를 올리곤 불을 지핀다. 한껏 물기를 머금은 초록빛 쑥은 어느새 싸한 회색 연기를 뿜어내며 마당을 자욱하게 휘감는다. 그리고는 독한 모기며 온갖 벌레들을 몰아내 주는 그야말로 친환경 여름해충 퇴치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조금은 맵기도 한 알싸한 쑥 향을 감싸 안은 회색빛 연기에 질끈 감은 눈을 뜨게 하는 데에는 엄마의 부지런한 부채질이 있었다. 모깃불이 점점 사그라들어 가벼운 재로 남을 때까지 우리 가족은 평상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세며 깊어가는 여름날을 즐겼다. 나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세 살 아래 남동생은 아버지의 다리를 베개 삼아 나란히 누워 두 분의 부채질에 잠이 들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은은한 달빛을 이불 삼아 눈을 감으면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두 분의 정담(情談)들이 자장가처럼 편안했다. 유년의 일상을 채워준 사소한 기억들이 네모난 보자기처럼 두고두고 내 삶을 감싸 안아주고 있다.

오늘도 방송에서는 폭염의 기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학업으로 학기 내내 타지에서 홀로서기에 고군분투하던 아이도 방학이라 집으로 내려왔다. 모처럼 아들을 위해 밀가루를 직접 반죽해 국수를 밀고 콩을 삶아 갈아낸다. 집밥이 보약이란 옛 어른들 말씀이 생각나 이것저것 여름 별미를 챙겨 먹여본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이가 배가 아프다며 드러눕는다. 밖에서 찬 음료를 많이 마셨단다. 나는 지난해 담가 둔 매실 액으로 이 녀석의 배앓이를 다스려볼 참이다. 더운 여름 자식을 위해 내 부모가 마음을 썼듯 말이다. 대(大)자로 누워서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어 뵈는 아이에게 잔소리 대신 얇은 이불로 배를 덮어주고 나의 무릎도 내어준다. 가벼운 부채질은 덤이다. 자연이 주는 시원함이 싫지 않은지 휴대폰은 던져둔 채 낮잠이 길다. 이렇게 흐르는 소소한 시간이 훗날 이 아이에게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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