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이 옛길 끝 수월정에서 만나는 행동하는 학자 노수신
산막이 옛길 끝 수월정에서 만나는 행동하는 학자 노수신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8.0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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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산과 호수, 그리고 청정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 괴산 산막이 옛길이다. 최근 걷기 열풍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아름다운 괴산호를 끼고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호수의 한가운데 막다른 마을에 도달한다. 이 마을이 산막이 마을이다.

산막이 마을 안에 괴산호의 멋진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고 병풍바위가 바라보이는 곳에 기와집 한 채가 외로운 듯이 호수를 지키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노수신(1515~1590)이 유배생활을 하던 수월정(水月亭)이다. 괴산댐 건설로 인해 수몰위기에 처하게 되자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건물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1987년 충북 기념물 제74호가 되어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전라도 광주 출신인 노수신은 17세 되던 1531년(중종 26)에 당시 명망 높은 성리학자 이연경의 딸과 결혼해 그의 문인이 되었다. 그 후 29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의 편에서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킨 일이 있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19년간이나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유배기간 동안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고 당대 최고의 학자인 이황, 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중국 송나라의 대학자인 진백의`숙흥야매잠'을 주해했는데,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하여 선비들 사이에 암송됨으로써 노수신의 명성이 더욱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불교 승려들과 교류해 성리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학문의 세계를 다양하고 폭넓게 연구하던 학자였다.

선생은 1565년 다시 이곳 괴산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가, 1567년 선조 즉위 후 풀려나 승승장구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3년 뒤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 인물이다.

노수신은 천성이 온유하고 성격이 원만하여 모든 선비들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특히 백성들의 칭송은 물론 선조 임금으로부터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그가 진도에 귀양 갔을 때 일이다.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선생은 섬의 백성들을 예법으로 교화하여 마침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여름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노수신 선생의 귀양지를 찾아가서 행동하는 양심을 찾고 싶다. 괴산호의 멋진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수월정에 앉아 연하구곡의 하나인 병풍바위를 바라보며 노수신의 학문의 열정과 백성을 향한 사랑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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