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삶을 꿈꾼 인품도야의 장, 추월정(秋月亭)
주자의 삶을 꿈꾼 인품도야의 장, 추월정(秋月亭)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19.08.0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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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청주의 동쪽에 위치한 낭성면과 미원면 일대는 한남금북정맥 산줄기가 지나고 있어 청주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지형이 높은 편이다. 이중환도 『택리지(擇里志)』에서 이 일대를 `산동(山東)'이라는 명칭으로 불러 동쪽지역이 높음을 반영하고 있다. 물줄기도 산곡지역을 흐르며 하천 폭이 좁고 유속이 빠른 편이어서 계곡이 발달하여 명승지가 많다.

그중에서도 옥화구곡은 미원면 운암리에서 어암리에 이르는 계곡, 산, 기암괴석, 숲으로 이루어진 10km 구간을 일컫는다. 이곳은 남한강 상류인 박대천을 따라 청석굴, 용소, 천경대, 옥화대, 금봉, 금관숲, 가마소뿔, 신선봉, 박대소 등이 펼쳐져 있다.

추월정은 옥화9경 중에서 제5경이며, 대표적인 절경으로 꼽히고 있는 옥화대(玉華臺)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언덕 밑으로 흐르는 박대천이 소(沼)를 이루어 달빛을 투영하고, 주위로는 울창한 송림이 펼쳐져 있어 정자의 입지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옥화대는 들판에 옥처럼 떨어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조 있는 선비들이 아끼던 장소였다.

추월정은 조선 선조 때 한림학사로서 강직한 선비였던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세운 정자이다. 이득윤은 낭성팔현의 한 사람이고, 청주 신항서원의 창립멤버이며, 그 서원의 원장을 맡았으며, 마침내 그곳에 배향되었다. 그러한 행적으로 보아 그는 당시 청주지역을 이끈 중요한 인물 가운데 가장 중심에 우뚝 서 있던 학자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득윤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주변 경승을 시가로 노래한 것은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자(朱子)의 행적을 본받은 것이다. 성리학의 철학체계를 일으켜 세운 주자는 만년에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무이산에 들어가 무이정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무이구곡이라는 아홉 구비 경승지를 찾아 무이구곡가를 지었다.

16세기에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로 대표되는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고 성리학을 삶의 모든 전거로 삼았다. 주자의 행적이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주자가 은거하던 무이구곡은 일찍부터 조선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비록 무이구곡을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무이구곡의 경치를 그린 그림을 통해 상상력을 키웠다. 나아가 조선의 땅에서 무이구곡과 비슷한 구곡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율곡 이이는 해주의 은거지에 고산구곡을 열었고 한강 정구는 성주 서쪽 긴 계곡에 무흘구곡을 꾸몄다. 그 전통은 17세기로 이어져 송시열의 화양구곡이나 김수증의 곡운구곡으로 이어졌다. 구곡의 아홉구비 경승지마다 각각의 이름이 정해지고 이를 노래한 시가 지어졌다. 아홉구비 중에 적당한 곳에는 자신이 거처할 정사나 서재를 마련했다. 이렇게 자연에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짓고 그 안에 머무는 과정에서 조선선비들의 독특한 자연관과 건축관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득윤도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에 머무르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경승지를 둘러보고 `서계구곡', `옥화구곡'을 설정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바닥은 전체적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나 내진부분을 외진부분보다 한 단 높게 단을 두어 공간을 구획하고 있다. 아마도 위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자의 이름도 주자(朱子)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중 한 구절인 `공손히 생각하니 천 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恭惟千載心)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춤이로다(秋月照寒水)'에서 따온 것이다.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다.'는 속뜻이 숨어 있으니 서정스러운 경지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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