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류
이안류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7.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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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여름바다는 시끌시끌하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파도소리마저 허공으로 부서진다. 하소연하는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주고 연인들의 속삭임도 숨죽여 듣는다. 친구들과 연인과 가족들이 밀물로 왔다가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래톱에 켜켜이 쌓는다.

바다는 거부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을 맞는다. 때로는 넓은 가슴으로 아픔을 품어주고 사랑이 깊어지는 배경이 되어준다. 이런 바다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끔찍한 음모를 감추고 있을 줄이야. 짧은 시간에 갑자기 나타나 수심이 깊은 먼 곳으로 순식간에 휩쓸고 가는 공포의 물살을 숨기고 있다. 언제, 어디서 출현할지 모르는 상어만큼이나 두려운 자객인 셈이다.

올해도 7월 초에 제주도의 해수욕장에 모습을 비추었다고 한다. 여름마다 수백 명을 집어삼키는 해류다. 지형적인 요인과 파도의 특성, 기상학적 요인이 작용해 발생하게 된다. 해안 가까이로 밀려오는 파도가 부서지면서 바닷물이 한곳으로 모여들고 좁은 통로로 다시 급하게 바다로 빠져나갈 때 생긴다는 것이다.

폭은 10~40m에 길이는 500m지만 물살은 초속 2~3m로 매우 빠르다. 한번 휘말리면 도망 나올 새도 없다. 죽음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려면 물길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좌.우로 움직여 45도 각도로 헤엄쳐서 나와야만 벗어날 수가 있다.

이 해류는 영화 빠삐용에도 나온다. 살인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금고털이범 빠삐용이다.

그는 절벽 위에서 파도를 응시하며 탈출을 꿈꾼다. 야자열매를 바다에 던져 파도를 관찰하는 중에 우연히 섬에서 멀어지는 조류를 알아낸다. 일곱 겹의 파도가 섬을 향해 밀려오는데 마지막 일곱 번째 파도가 오면 섬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물살을 발견한다. 마침내 야자열매가 가득한 포대를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섬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는 “자유를 향한 조류”라고 외친다.

죽음의 물결이 한몫을 하여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거센 물결이라는 격조(激潮)를 의미하는 해류. 하루 가운데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파도의 습격. 순간 죽음의 공포로 휘몰아치는 물숨. 이안류(離岸流)이다.

인생의 바다에도 파도가 끊임없이 일렁인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내내 파도가 일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나를 쓰러트리고 주저앉게도 했다. 오히려 잔잔한 날들이 많을수록 희망이 없어 불안해지는 나였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서 삶의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제자리걸음으로도 자꾸만 뒷걸음쳐지는 게 싫었다.

생의 바다는 넓어 혼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나에게 8년 전 그이의 결단은 몰아친 격류였다. 집안의 살림은 몰라라 하던 사람이다. 신문기자로 자존감만 내세우던 이가 청소업을 하겠노라 통보를 해왔다.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에 고집스런 자존심을 다치고 당당함만 잃어 좌절할까봐 걱정 할 사이도 없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휘몰아친 파도였다.

나를 단숨에 삼켜버린 그 날의 파도가 있어 지금의 유유한 내가 있다. 막막하고 아득한 외딴 섬. 그 섬으로부터 지쳐 포기하려는 나를 탈출시켜준 이안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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