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일(克日)과 스테이케이션
극일(克日)과 스테이케이션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7.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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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7말 8초. 바야흐로 성하의 계절에 휴가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궁색한 장마가 지나고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거리의 자동차 행렬도 눈에 띄게 줄었고, 자영업자들의 작은 식당들도 휴가 안내문을 내걸고 문을 닫은 집이 여러 곳이다. 어찌 7년을 기다렸는가. 도심지 비좁은 나무마다 장마의 끝을 기다렸다는 듯이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소서팔사(消暑八事). 한시를 통해 여름 더위를 식힐 수 있는 8가지 방법을 추천했는데, 그중 하나 「숲속에서 매미소리 듣기( 東林聽蟬 동림청선)」은 휴가 중 음미할 만하다.

자줏빛 노을 붉은 이슬 맑은 새벽 하늘에(紫霞紅露曙光天 자하홍로서광천)/ 적막함 가득한 숲 속 첫 매미소리 들리니(萬寂任中第一蟬 만적임중제일선)/ 괴로운 지경 다 지나 이 세상이 아니요(苦境都過非世界 고경도과비세계)/ 둔한 마음 맑게 벗어나니 바로 신선이로세.(鈍根淸脫卽神仙 둔근청탈즉신선)/ 묘한 곡조 높이 날려 허공을 걷는 듯(高飄妙唱虛步 고표묘창능허보)/ 다시 애절한 흐름 잡아 떠다니는 배처럼(旋?哀絲汎壑船 선닉애사범학선)/ 석양에 이르러 그 소리 더욱 듣기 좋으니(聽到夕陽聲好 청도석양성갱호)/ 책상 옮겨 늙은 홰나무 곁으로 가고자 하네.(移床欲近槐邊 이상욕근노괴변)

나는 장마가 시작되기 전 일찌감치 휴가를 다녀왔다. 한동안 방,콕, 이라고 불렸던 스테이케이션으로 짧은 이틀을 보냈다. 스테이케이션은 머물다(stay)와 휴가(vacation)를 합성한 신조어인데, 국립국어원의 `우리말 샘'에는 휴가철에 먼 곳으로 떠나는 대신 집이나 집 근처에 머물며 휴가를 지내는 일로 뜻풀이가 되어 있다.

미뤄두었던 책을 벗 삼아 휴가를 보내면서 나는 스위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의 「탐욕의 시대.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에서 “식민지배를 했던 나라들이 국수주의적인 미화 없이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는 것으로 치유를 시작해야 한다.”는 대목에 형광펜으로 굵게 밑줄을 그어 놓았다.

나비가 되어 이승과 저승을 훨훨 넘나들고 있을 김복동 위안부할머니는 생전에 “우리는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라고 안타까워하며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당당하게 요구해 왔다.

우리는 여전히 국가 간 협정이 개인의 청구권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국제법 원칙임을 부정하면서 강제징용피해자들에 대한 우리나라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문제가 있음을 들먹이는 세력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 반민족 친일 행위자에 대한 색출과 처벌이 무산된 이후, 잔존 친일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개인의 청구권 자체가 소멸되었음을 주장하는 세력의 득세를, 우리는 여태 차단하지 못한 채 100년이 가까운 세월을 신음하고 있다. 차고 넘치는 친일의 의혹이 세력 상실의 불안으로 드러내는 그들, 우리 안의 일제 잔존세력들은 일본의 광기를 부추기는 만행을 여전히 숨기지 못하는 도발을 거듭하고 있다. 그들은 전략물자 수출과 관련된 통계에서 불법 수출 적발건수를 수출건수인 것으로 비틀어 보도하는 가짜뉴스로 일본을 이롭게 하고, 이를 인용한 일본의 언론보도를 확대 재생산하며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들과 여전히 같은 땅에서 살고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은 습관처럼 우리에게 불신과 불안을 주입시켰고, 함부로 위급함을 증폭시켜온 세상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반공과 친북, 그리고 안보로 치닫는 그들의 광기는 끝내 핵무장이라는 인류 공멸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하게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평화를 극도로 싫어한다. 조선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던 일본에 대해 우리가 줄기차게 저항해 온 이름은 평화였고, 지금 한반도의 평화는 일본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러시아와 중국 공군의 합동군사훈련 과정에서 비롯된 침범에 대해 당당하게 경고사격을 할 정도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굳센 힘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굳세게 극일(克日)을 외치고 실천하는 국민들이 있다. 이번 여름 우리 안의 적들과 일본의 만행을 차분하게 되돌아보는 역사공부의 스테이케이션에 더위는 자리 잡을 곳이 없다.

매미의 치열한 울음소리가 새삼 청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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