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독백도 들을 수 있을까
아베의 독백도 들을 수 있을까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7.28 2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이 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바다와 상공이 일본 제국에 의해 계획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의회를 찾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진주만의 미 해군이 일본의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바로 다음 날, 의회에 대일 선전포고를 요청하는 자리였다. 5분여에 불과한 그의 짧은 연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일본 비행대가 하와이 오하우섬 폭격을 시작한 지 한 시간 후에야 주미 일본 대사는 최근 미국이 (일본정부에) 보낸 서한에 대한 공식 답변서를 우리에게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이 답변서에는 기존의 외교 협상을 지속시키는 것이 불필요할 것 같다는 언급만 있었을 뿐, 전쟁이나 무력을 동원하겠다는 위협은 물론 암시조차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감안할 때, 어제의 공격은 여러 날이나 여러 주 전부터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입니다. 일본은 이 공격을 준비하면서 지속적인 평화를 희망한다는 거짓말로 미국을 속여왔습니다”.

루즈벨트의 주장은 100% 사실이다. 일본은 미국과 태평양 지역의 평화협상을 벌이면서 미국의 핵심전력인 태평양함대가 주둔한 하와이 공습을 은밀하게 준비했다. 병사들이 외출하거나 휴식을 취해 경계나 반격이 허술해질 일요일을 선택했다. 일본은 기습으로 하와이 미 해군을 궤멸시킨 후에야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평화협정에 응하는 척 상대국을 기만한 후 불시에 공격해 거둔, 세계전사에 남을 추악한 승리였다.

이번에도 일본은 기습적으로 한국경제의 숨통을 공격했다.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규제는 사전 협의는커녕 예고도 없이 이뤄졌다. 바로 이틀 전 오사카에서 OECD 정상회의를 주관한 아베 일본 총리는 “자유롭고 개방된 경제는 글로벌 평화와 번영의 뿌리”라고 연설했다. 이웃 국가를 향한 옹졸하고 비열한 경제보복을 치밀하게 준비하면서 밖으로는 자유무역과 국제평화를 설파한 것이다.

일본의 하와이 기습은 루즈벨트 연설 대로 미국으로서는 일대 치욕이었다. 해군은 사상 최악의 피해를 기록하며 치명상을 입었다. 대형 전함 7척 중 5척과 항공기 300여대가 파괴되고 2400여명이 전사했다. 더 큰 모욕은 정보와 외교전에서의 참패였다. 미군은 진주만을 겨냥한 일본군의 지속적인 항공훈련을 감지하지 못했다. 정보부대가 일본의 선제공격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한 귀로 흘렸다. 외교당국은 진주만 기습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질질 끄는 일본의 술책에 농락당했다.

그러나 진주만 피격 당시는 물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일본에 기만당한 외교적 무능과 군부의 실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어디서도 터지지 않았다. 정치권도 언론도 전쟁을 수행할 정부에 힘을 보태고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는 데 주력했다. 모병소마다 젊은이들이 이룬 장사진은 1차대전 참전 때의 2배에 달했다. 진주만 공습을 다룬 영화 `도라, 도라, 도라'는 이날 기습공격을 지휘한 야마모토 일본 제독의 독백으로 끝난다. “잠자는 거인을 깨웠다”. 전쟁은 그의 말대로 끝났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가 핵공격을 받는 전대미문의 참화를 겪고 나서 신처럼 떠받드는 천황에게 항복문서를 읽게 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 고립무원이다. 정치판에서 비상한 상황을 타개할 해법을 함께 고민하는 우군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무능과 무대책을 지적하는 모진 공세와 국민적 감성에 의존하는 반격만이 악다구니를 벌인다. 집권당과 제1야당 사이에는 친일 시비까지 벌어지고, 다른 두 야당은 당권 싸움에 여념이 없다. 언론은 각각의 속내에 따라 중구난방이다. 일반 국민의 고군분투만으로는 아베로부터 “잠자는 한국을 깨웠다”는 후회를 끌어내기 어렵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