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의 풍속을 교화하는 단양향교 풍화루
단양의 풍속을 교화하는 단양향교 풍화루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19.07.2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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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충북 단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문구들이 있다. `단양 팔경',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다. 모두 남한강 물길과 기이한 석벽이 어우러진 단양지역의 아름다운 산수를 상징화한 것이다.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는 `금강산에는 이러한 물이 없고, 한강의 다른 곳에는 이러한 산이 없으니 우리 조선에서 제일가는 강산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단양지역은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일찍 춥다.”고 했다. 조선시대 단양군수에 대한 기록 중에 산물이 적다고 하여 단양군수 부임을 회피했다가 뒤에 들통나 파직당한 얘기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단양 수몰이주기념관 앞마당에 있는 황준량의 선정비는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조선 명종 때 단양군수로 부임해서 도탄에 빠진 단양 백성을 구해 낸 역사상 가장 훌륭한 목민관으로 꼽힌다. 그는 부임 후 피폐한 고을의 참상을 살피고는 임금에게 상중하 대책을 제시한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상소문이 조정에 도착하자 대신들의 논의가 일었으나 갑론을박 끝에 황준량이 제시한 상책에 따라 단양의 조세와 부역을 10년 동안 모두 감면한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처럼 단양은 경치는 좋지만 농토가 많지 않아 가난한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척박한 단양지역에 교육과 문화기능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 단양향교다. 단양향교는 1415년(태종 15)에 단양군수 이작(李作)에 의해 창건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이 군수로 있을 당시 중방리에서 상방리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명종 때인 1557년에서 1558년에 걸쳐 군수 황준량이 명륜당을 다시 지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양향교는 앞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는 강학공간을 두고, 뒤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를 배치한 제향공간을 두는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학공간은 지형조건에 따라 명륜당을 서쪽에 두고, 동재와 서재를 동쪽에 배치하는 서당동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과 향교의 정문이 누각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향교건축에서 외삼문을 누문으로 만든 것은 충북지역에서 드문 예이다. 향교에 루가 집중적으로 건립되는 것은 사회기강이 문란해지고 유풍(儒風)이 붕괴된 조선시대 중ㆍ후기부터다. 임진·병자 양 전란이 끝난 사회적 혼란기에 민풍(民風)을 수습하고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던 목적으로 전국의 많은 향교에는 `풍화루(風化樓)'라는 이름의 누각이 건립된다. 풍화루는 `풍속(風俗)을 교화(敎化)하는 곳'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단양향교 풍화루는 `1416년(태종 16)에 지군(知郡) 이작(李作)이 세웠는데, 기(記)가 있다.'라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단양향교의 정문으로서 단양향교의 건립과 그 역사를 같이하니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풍화루일 것이다.

단양향교 풍화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2층 누각이다. 1층 가운데 칸의 기둥 사이로 문을 달아 향교의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북측으로 붙어 있다. 2층 누각은 사방이 트인 마루이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지금은 충주댐에 수몰되어 그 정취를 찾을 길이 없지만, 그 옛날 풍화루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중첩된 산봉과 그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를 보면서 유생들은 호연지기를 키웠을 것이다.

현재 해체 보수공사 중인 단양향교 풍화루 종도리 밑에서 1940년 보수공사를 알려주는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니, 새로운 단양향교의 역사가 추가되는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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