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의 기나 긴 후유증
한일협정의 기나 긴 후유증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7.21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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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1964년 어느 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심복인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차지철을 불러 밀명을 내린다.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절대 권력을 누리다 10.26때 궁정동에서 대통령과 함께 생을 마친 그 인물이다. 그에게 내려진 지시는 당시 정권이 추진하던 베트남 파병을 야당과 호흡을 맞춰가며 국회에서 적극 반대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파병을 밀어붙이던 차지철에겐 뜻밖의 명령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경제적 대가를 받아낼 요량이었다.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대여론이 형성돼 미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써먹어야 하는 데 베트남 파병에 대한 국내의 반응이 미적지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차지철을 불러 야당과 공조를 하더라도 파병 반대 분위기를 고조시키라는 하명을 한 것이다. 이 계책은 실패했다. 차지철이 야당의원들과 한 목소리를 내다 파병반대 논리에 설복돼 아예 소신까지 바꿔버린 것이다. 특히 강대국인 프랑스를 스스로의 힘으로 내몰고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의 근대사를 듣고는 이 나라에 매료돼 버렸다. 그는 베트남과의 전쟁은 옳지않은 것 같다며 공화당 의원들까지 설득하고 다니다 청와대로 불려가 혼줄이 났다고 한다. 스파이로 밀파한 심복이 적과 한통속이 돼 돌아온 것을 보고 박정희는 기가 찼을 것이다.

젊은 이들이 명분없는 이국의 전쟁에 동원돼 목숨을 걸어야 하는 파병 문제가 왜 당시에 이슈가 되지 않았을까. 실제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한국인은 5000여명에 달한다. 당시 한반도를 삼킨 이슈는 한일협정 문제였다. 대학생은 물론 고둥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매국적 협상으로 일제의 식민 지배에 면죄부를 준다며 결사 반대했다. 야당 역시 여론을 좇아 한일협상 저지에 올인하면서 베트남 파병은 논란에서 밀려났다.

한일협정은 국민의 목숨을 담보한 베트남 파병까지 뒷전으로 밀릴 정도로 국민이 반대했던 사안이었다. 3억달러로 나라의 자존심을 일본에 팔아먹은 제 2의 을사늑약이라는 비판으로 나라가 들끓었다. 시위가 격화하자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하고 무력으로 여론을 제압한 후 협약을 밀어붙였다.

박정희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베트남 파병 반대여론을 사주했으면서도 정작 일본과의 협상에서는 범국민적 반대여론을 압박카드로 활용하지 못했다. 우선 36년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는 한 마디도 협약안에 담아내지 못했다. 을사늑약을 비롯한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은 모두 무효로 한다는 조항을 놓고도 `이미'라는 단어를 끼워넣자는 일본의 고집에 밀려 후퇴했다. 일본은 `.... 이미 무효가 됐다'는 조항을 관철한 후 `원래는 유효한 조약이지만 한국이 독립을 했으니 이젠 무효가 됐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일본의 식민지배는 일본에 책임을 물을 수도, 사과를 요구할 수도 없는 정상적인 외교 행위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끼친 손실이나 피해를 보상한다는 의미의 배상금을 줄 수는 없다고 주장했고, 우리 정부는 이마저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한국에 준 3억 달러의 무상자금은 일본이 선심을 쓴 독립축하금이나 경협자금으로 불리고 있다.

일본은 사과 한마디 없이 청구권협정 2조를 관철시켰다. `양국과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못박은 것이다. 일본은 이 조항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툭하면 한국이 청구권협정을 위반한다고 타박해 왔다. 지난해 대법원의 징용판결에 대해서도 이 조항을 들이대며 반박했고, 수출규제라는 경제보복에까지 이르렀다. 국민의 동의없이 강행한 부실하고 불공정한 국제조약이 초래한 후유증을 후손들이 호되게 겪고있다. 그 중에도 고통스러운 것이 “일본이 준 돈으로 한국이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며 경제발전의 기틀을 닦았다”는 일본의 주장과 똑같은 소리를 한국사람의 입에서 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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