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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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4.1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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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산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 우 석 <충주보훈지청장>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 된지 88주년 되는 뜻 깊은 날이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간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당황한 일제(日帝)의 가혹한 탄압이 더욱 거세지던 때인 그해 4월 13일 우리의 민족지도자들은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여망을 한 곳으로 결집시켜 조직적으로 항일(抗日)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20세기초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많은 민족들도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우리민족처럼 임시정부를 건립하여 27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임시정부는 한민족이 일제(日帝)의 식민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한다는 상징체였고, 우리민족의 대표기구이며,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나갈 최초의 기구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서 주권 재민과 삼권분립의 원칙을 천명하는 등 민주헌정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각료로는 의정원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이 임명되었다.

그해 6월 임시헌법을 제정·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대통령중심제의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오다 1926년 9월 대통령제를 폐하고 국무령제를 채택하였다.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맡았던 백범 김구선생은 그 후 내무총장, 국무령, 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활동방향을 의열투쟁으로 정립하고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휘하면서 항일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상해에 이어 항주, 진강, 장사, 광동, 유주, 중경 등지로 정부청사를 옮겨 다니면서 항일독립운동을 끊임없이 펼쳐 나갔다.

1940년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주석 김구와 외무총장 조소앙 명의로 대일 선전포고를 발하여 중국, 미국 등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획득한 임시정부는 미군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을 계획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정통을 이어온 임시정부는 수많은 순국열사·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면면히 이어져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민족의 대표기구로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통할해 나가는 역할과 임무를 27년 동안 수행하여 왔다. 현재 대한민국 통치의 근간인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 정통성과 독립정신을 인정하고 계승하고 있으며, 수많은 독립 애국지사를 임시정부 활동기록을 통해 발굴하고 훈·포장을 추서하고 있다. 지금도 중국 상해에 가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던 가옥과 민족지도자였던 김구 선생의 유품을 접할 수 있다. 임시정부에서 표방한 민주·정의·독립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후손들이 음미하고 계승해 나가야 할 가치가 아닌가 싶다. 한민족사에 흐르는 공동체 의식이나 국난극복의 정신이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굳건히 자리 잡을 때 부강하고 성숙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제88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중국 내에 남아있는 임시정부 관련 유물을 찾아내어 새롭게 단장, 길이 보전하는 일일 것이며, 이는 후손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며, 의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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