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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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7.1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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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화닥닥, 번갯불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천만 볼트의 전율이다. 열(熱)고압선이 손가락에 닿자 소스라치게 내둘려 아뜩하다. 감전의 떨림이 온몸으로 번졌다. 외마디소리조차도 깨물지 않은 포도 알을 통째로 넘기듯 삼켜버린다. 한 질금 눈물이 쏟아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살이 점점 더 기세를 부리며 화끈거려왔다. 수도를 틀어 찬물로 식혀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화기에 나도 모를 서러움이 북받쳐온다. 봇물로 터진 울음은 장마가 지나간 깊은 강물의 우렁우렁 소리를 냈다. 영문을 모르는 그이가 놀라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잠시 사태파악을 하는 눈치였다.

잘 달구어진 프라이팬의 응징은 엄청났다. 헛된 꿈을 꾸느라 딴생각을 하는 나에 대한 뜨끔한 경고였다. 마치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통증이었다. 화끈거림이 조금 달래지자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왔다.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물집을 본 그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구워지다가 만 호박전에 뒤집힌 속풀이를 쏟아냈다.

“이런 반찬은 안 먹어도 되니까 앞으로는 굽거나 튀기는 음식은 하지 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괜찮아하고 물어보아야 하는 것 아니야”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서운할 수가 있을까. 그제야 상처를 살피면서 많이 아프겠다고 걱정을 했다. 속이 얼마나 상하면 그랬겠느냐는 것이었다.

수포는 탱탱한 풍선이 되었다. 가시를 갖다 대자 바람 빠진 공모양 쭈글쭈글하다. 임시 처치로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 후 다음날 병원을 갔다. 의사선생님은 수포를 터트리고 왔다고 혼냈다.

릴케도 가시에 찔려 파상풍으로 죽지 않았느냐며 피부가 괴사할 수도 있다고 한다. 소독이 중요하여 바늘을 불에 달구어 식힌 후에 따야 한다는 것이다. 무지한 행동을 한 게 부끄러워 벙어리가 된 채 진료를 마쳤다. 가제로 칭칭 감은 손가락을 보니 마음이 심란하다.

병원을 나오면서 저마다 마음에 퉁퉁 불거진 물집을 생각해본다. 그이가 속상해서 한 말이 듣는 나로서는 상처였다. 불뚝 성이 나서 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안에서 화가 치민다 하여 여과 없이 불쑥 내뱉는 것은 상대방에게 큰 생채기를 남긴다.

남녀 간에 대시도 상대가 계속 싫다고 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질기게 굴면 폭력이 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라는 말은 옛말이다. 자기가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봉숭아 씨방이라고 해서 나와 똑같은 마음이지 않다. 원하지 않는 접촉도 마찬가지다. 거부반응으로 소름이 끼치도록 괴롭고 힘들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죽고 싶은 생각이 극한 상황으로까지 몰고 가기도 한다.

진심을 다했다면 그 마음이 나에게 서서히 기울어지기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끝까지 거절당한다면 제 스스로 터지도록 두어 자신의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사랑의 구걸을 강요하는 억지는 무서운 폭력이다.

내 안의 물집은 함부로 터트리는 게 아니다. 화상도 수포를 따기 전에 소독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 자신을 정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가 되지 않아 서둘러 건드리면 균이 들어가 상처를 덧나게 한다.

릴케는 장미의 가시에 찔려죽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보리수가시에 찔려 죽을 뻔했다. 여자 친구를 위하여 꽃을 꺾다가 찔린 가시는 낭만적인 시인의 사인(死因)으로 남아있다. 하필이면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나무라니. 가시로 하여 무지를 깨우치라는 뜻일런가. 하마터면 내 인생 일대기의 흑역사로 남아 주위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 아찔한 감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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