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이 생각나는 까닭
평양성이 생각나는 까닭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7.14 1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가 국내에서는 1592년 벌어진 임진왜란에 비교되고는 한다. 일부 매체는 여러 암시와 조짐에도 불구하고 준비 없이 시간을 허송하다 뒤통수를 맞았다고 정부를 비판하며 임진왜란을 언급했다.

어떤 학자는 “무역 분규가 아니라 침공 행위에 다름없다”고 일본 정부를 비난하며 21세기 임진왜란이라고 표현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같은 주장을 접하며 문득 임진왜란 당시의 평양성이 떠올랐다.

평양성은 임란을 통틀어 가장 문제적이면서 통탄스러운 지점으로 꼽힌다. 바로 앞 대동강이 거대한 해자 구실을 하며 성을 방어하고, 성곽이 세 겹으로 둘러처져 고구려 때부터 난공불락을 자랑해온 성이다. 부산에 상륙한 지 두 달여 만에 한양과 개성을 돌파하고 평양까지 치달려온 왜군의 파죽지세도 수심 깊은 대동강에 이르러서는 한풀 꺾였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대동강을 건널 방도를 고심하며 초조감을 달래야 했다.

천혜의 요새인 평양성에서의 한판은 적의 예봉을 꺾고 전세를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였지만 왜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양성을 접수했다.

선조가 왜병이 대동강에 닿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성안의 사기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좌의정 윤두수와 도원수 김명원 등이 남아 관군을 지휘했고 1만여 백성의 항전의지도 높았다. 더욱이 명나라가 출병을 결정하고 군대가 요동을 출발할 즈음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명나라 군대의 가세로 성의 전력이 더 두터워질 판이었다.

섣부른 선제공격이 화근이 됐다. 김명원은 정예병사 수백명을 뽑아 심야에 대동강을 건너가 적진을 기습하도록 했다. 적의 허를 찌른 지략은 인정할 만 하지만 작전이 문제였다. 전력이 우세한 적을 야간에 기습할 때는 신속한 공격과 철수가 관건이다. 조선군은 기습에는 성공했지만 동이 틀 때까지 전투를 끄는 실수를 범했다. 시야를 확보한 본진의 적들이 들이닥치자 조선군을 싣고 도강했던 배들이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당시 대동강에는 `왕성탄'이라는 개울이 있었다. 수심이 낮아 걸어서 대동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배를 놓친 병사들은 왕성탄을 건너 적진을 벗어났다. 적이 알세라 쉬쉬했던 비밀루트가 탄로 나고, 배를 마련해 강을 건널 궁리를 하던 왜군의 고민이 해결된 순간이었다. 바로 그날 왜군이 왕성탄을 통해 전면 공격을 해오자 조선군은 10만석의 군량미까지 남겨둔 채 성을 탈출했다.

조급한 선택과 부실한 작전이 가져온 결과였다. 열세의 전력이었던 만큼 우세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며 방어에 주력했어야 했다. 한 달 후 벌어진 조·명연합군의 1차 평양성 탈환작전도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왜군은 주력부대가 평양성을 떠났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성문까지 열어뒀다. 가벼운 술책에 속아 성급한 공격을 했다가 당한 부끄러운 패배였다.

외국의 손님을 창고 같은 옹색한 방에서 맞이하고 악수도 청하지 않은 일본 관리의 무례는 그들이 철저히 짠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것이다. 우리의 감성을 자극해 무모한 선택을 유도하려는 꼼수로 봐야 한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WTO까지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 됐고, 아베 체제는 중의원 선거가 끝나도 굳건히 유지될 전망이다. 이번 사태는 악화하고 장기화할 것이라는 얘기다.

정부는 안팎의 압박에 허둥대다 악수를 두는 일이 없도록 냉정한 자세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구멍 뚫린 외교 시스템을 점검하고 재구축하는 계기이자 일본이 부품 몇 개만 끊어도 휘청거리는 우리 산업구조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전화위복'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