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사과
대지의 사과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9.07.1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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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아버지 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잘생긴 씨알 굵은 감자는 뜨거운 햇볕 아래 반짝이고 바람은 사분사분하게 불었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구휼작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힘들게 많이 심어 수확하는 심중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자식은 아버지의 노동이 안타까웠다.

밭고랑마다 가득한 감자는 자식들과 사돈에게 넉넉하게 주고 남는 건 큰 자루마다 가득 담았다. 마치 주문을 받은 것처럼 자전거에 싣고 이 동네 저 동네 경로당에 가져다줬다. 지나던 사람이 탐스런 감자를 보고 팔라고 하면 금방 캔 것이라 분나고 맛이 좋을 거라며 상자째 그냥 주기도 했다. 노동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감성적이던 아버지는 넉넉한 살림이 아님에도 이상과 현실을 고민하지 않았다.

뽀얀 속살을 드러낸 감자는 부드럽고 달달하면서 분이 많이 났다. 지하창고에 작은 산으로 쌓여 내 집을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조금씩 담아줘도 일 년 동안의 간식과 만만한 반찬거리로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 워낙 감자를 좋아하다 보니 어쩌다 봄이 되어 바닥을 드러내면 시장에서 사다 먹지만 아버지의 감자 맛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감자를 받아들인 나라답게 아일랜드의 감자 맛은 상상을 초월했다. 커다란 냄비에 가득 쪄서 때마다 식탁에 올려졌다. 아버지가 농사지으신 가장 맛있다는 수미감자보다 부드럽고 분이 나서 아이 주먹만 한 걸 대여섯 개씩 먹었다. 곁들여 나온 스테이크는 슬쩍 옆으로 밀어놓았다. 밥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앞 접시에 쌓여가는 껍질을 보며 감자냄비를 밀어줄 때마다 민망해도 멈출 수 없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5세가 군대를 사열했던 땅에 감자를 재배하면서 화려하게 착검한 경비병들에게 감자밭을 지키게 했단다. 돼지먹이로밖에 쓰지 않던 감자밭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기아를 해결할 수 있는 구원으로 식량으로 더 이상의 홍보가 필요하지 않게 된 계기다. 대지의 사과로 격상된 감자가 유독 아일랜드에서 감자 없는 식사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걸 그들의 식탁을 보면서 알았다.

작은 텃밭에서 하지를 넘기고도 캐지 못했던 감자를 장마 오기 전에 수확한다고 넝쿨을 걷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작물인데 씨를 넣고 싹이 트면서부터 싹수가 노랬다. 물도 자주 주고 비료를 줘도 넝쿨은 비루먹은 개처럼 비실거렸고 감자 꽃은 구경도 못했다. 처음이라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실망이 컸다. 수확한 감자는 박스의 밑바닥을 겨우 가렸다. 동글동글한 것도 손에 꼽을 정도다. 대부분 길고 콩알만 하고 못생겼다. 애당초 나눠 먹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씨도 건지지 못한 감자를 여윈 시선으로 바라본다.

호미를 손에 쥐고 감자 캐는 풍경은 얼마나 정겨웠던가. 나에게 감자는 넉넉함이고 나눔이었다. 어떻게 하면 감자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지 아버지가 이곳에 없으니 알아볼 수도 없다. 정물화처럼 남아있는 아버지의 감자밭이 뜨거운 햇볕 너머 신기루처럼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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