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제월대에서 만나는 홍명희, 그리고 임꺽정
괴산 제월대에서 만나는 홍명희, 그리고 임꺽정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7.0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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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올해 현충일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거론해 논란과 함께 우려하는 분들이 많다. 언제까지 사상과 이념으로 편을 가르고 손가락질을 해야 할까? 통일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가 언젠가는 극복해야 하고,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숙제임이 분명하다.

우리 고장 괴산에도 김원봉과 비슷한 독립운동가 홍명희가 있다. 사람들은 홍명희를 소설 임꺽정의 저자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홍명희가 충북에서 최초로 일어난 3·1운동인 괴산 독립 만세 운동의 주동자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아울러 금산 군수이던 그의 부친 홍범식이 1910년 국권강탈에 항의해 자결한 사실은 더욱 모르고 있다.

홍명희(1888~?)는 독립운동가로 언론인으로 교육자로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였다. 다만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부수상을 지냈던 이력 때문에 아직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다가 일본에 유학한 홍명희는 국권강탈 직후 귀국하여 오산학교와 휘문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었고, 1920년대 초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7년 신간회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했고,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서 우리 민족에게 부단히 저항을 꿈꾸도록 일깨워준 소설 임꺽정은 당시 우리 문학계의 가장 커다란 성과물로 꼽힌다. 특히 우리 말, 우리 생활, 우리 정조를 일관되게 지켜 민족의 혼을 일깨웠으며, 문학적으로도 우리말의 보물 창고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28년 조선일보에 첫 연재를 시작한 뒤 세 차례에 걸쳐 중단되었다가, 광복 직후 미완의 상태로 전 10권이 간행되었다.

괴산읍 제월리에는 홍명희의 옛집이 있다. 그곳에서 가까운 달천(괴강)가에 제월대가 있다. 괴강이 넓게 펼쳐지며 수려한 경관을 이루는데, 홍명희는 이곳을 자주 찾아 생각을 정리했다고 한다. 제월대에 들어서면 주차장 공간 한편으로 하얀 색깔의 비석이 서 있다. 바로 벽초 홍명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문학비이다.

홍명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데, 먼저 나라를 위해 자결 순국한 충의지사를 아버지로 둔 독립운동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 유학 중 부친의 자결 소식에 급히 귀국해 삼년상을 치른 뒤,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귀국 후, 고향 괴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었으며, 신간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점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제월대 입구 홍명희문학비 앞부분에 적혀 있는 홍명희의 글이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서재 한구석에 있는 소설 임꺽정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 대학 시절 금지도서라서 몰래 숨어서 읽어야만 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정신이 깃든 우리말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보물 같은 작품 임꺽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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