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다’와 ‘밟다’의 차이
‘넘다’와 ‘밟다’의 차이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7.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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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동서로 나누어졌던 독일의 통일이 완성된 것은 1990년의 일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 11월 9일이었으나, 1990년 5월 18일 국가조약을 통한 양 독일의 경제 사회 통합 결정, 같은 해 7월 소련에 의한 독일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승인에 이어 그 해 10월 3일 분단 41년 만에 마침내 독일은 하나가 되는 과정을 숨 가쁘게 거쳤다.

2019년 6월의 마지막 날. 일요일인 그날 나는 하루 종일 TV 앞을 비우지 못했다.

어쩌다가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생각났고, 녹슨 철모와 그 철모를 관통한 총탄의 흔적이 강렬하게 각인된 흑백사진을 떠올리며, 전쟁의 상흔이 유난히 쓰라린 예순 아홉 번째 유월을 또다시 허망하게 넘어가겠거니 하는 쓸쓸함을 어쩌지 못할 때였다. 그런 유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나는 정제되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 카메라의 흔들림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TV화면을 통해 갑자기 박동하는 한반도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엉뚱하게도 내가 `베를린 장벽이 콘크리트와 벽돌의 구조물로 완벽하게 차단되지 않았다면 독일의 통일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동안, 반세기를 훌쩍 넘긴 그 긴 시간 동안 훤하게 뚫려 있음에도 볼 수 없었고, 보지 못했으며,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반도를 두 동강 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민통선은 접근은커녕 관심조차 기울여서는 안 되는 절대공간이었다. 그날, 2019년 6월 30일 일요일 오후 나는 그곳에 어떤 절벽보다 가없는 30cm가량의 경계석이 마침내 밟히는 광경을 보았다. 북측으로 성큼 넘어선, 역사에 북측의 땅을 최초로 밟은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된 도널드 트럼프가 북측의 김정은 위원장과 다시 남측으로 넘어설 때 그들이 경계석을 밟은 일은 그저 무심코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불과 1년 전 4월 27일 남북의 정상들이 손을 부여잡고 지나던 경계석은 어쩌면 감히 밟을 수 없는 지극한 존재요, 공간이었으리라. 함부로 밟을 수 없는 성스러움과 온 겨레가 학수고대하던 통일 그리고 평화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함은 그날 4월 27일, 조심조심 경계석을 넘어야 했던 당사자 남과 북 정상의 호흡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숨 가쁘게 이어졌던 대화의 물꼬는 때론 우리를 절망하게 하였고, 이대로 우리의 꿈은 멀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으로 다시 희망은 옅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끈질긴 설득과 초청을 통해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이 `자유'라는 인류의 존엄한 가치가 새겨진 건물에서 함께 만나는 중대한 진전을 만들어 냈다. `자유'는 그동안 북측이 내심 꺼려왔던 인류의 중요한 가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자유가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고, 평화는 서로간의 존중과 자유로움이 유지될 때 비로소 완벽해질 수 있다. SNS를 통한 급진적이고 느닷없는 제안에 기꺼이 응하고, 격식을 무너뜨리며 절제와 정제가 충분하지 않은 영상이 전 세계에 동시에 전파되었던 일은 그 자체가 충분히 유연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이다.

우리 고유의 풍습에서 깨지는 것을 기꺼워하는 경우는 결혼하기 전 신부 집에 사주와 단자가 들어 있는 함이 들어갈 때가 유일하다. 함진애비는 신부 집 문지방을 넘어서면서 바닥에 엎어놓은 바가지를 발로 힘껏 밟아 산산조각 내는 통과의례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은근슬쩍 뒤따라오는 귀신들이 바가지가 깨지는 소리에 놀라 달아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남과 북이 정성과 조심으로 그저 넘었던 경계석을, 미국과 북한이 질끈 밟고 넘어서며 한반도의 모든 평화와 통일의 걸림돌과 모순들도 함께 밟아버렸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많은 보이는 것들을 보지 못하거나 못 보게 하고, 또 외면하며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넘어서는 것을 초월해 당당하게 밟을 수 있는 길로 들어섰다. 평화는 낡은 것을 밟아버리는 용기를 간절히 원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세상일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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