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칭개와 엉겅퀴
지칭개와 엉겅퀴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7.0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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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멀리 밭이 하얗다. 무엇일까. 이끌리듯 간 곳에는 들꽃이 제대로 터를 잡았다. 사람들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풀로 묵정밭은 꽃밭이다. 지칭개는 잠을 털어내지 못한 부스스한 더벅머리의 노총각 같은 얼굴로 서 있다. 늦도록 혼기를 놓치고 홀로 외로움에 지쳐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표정이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에 손빗을 갖다 대자 부풀어 오른 갓털이 날아간다. 이 또한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내 퍼뜨리려는 눈물겨운 이별이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를 떼로 합창하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온다. 꽃은 보랏빛을 잃고 솜털을 풀어헤쳐 일제히 떠날 태세다. 이즈음이면 몸체는 시들어가며 마른다. 제 몸에서 갓털이 다 떠나고 나면 그대로 선 채로 고사한다.

지칭개라는 곱지 않은 이름은 상처 난 곳에 잎과 뿌리를 짓찧어 바르면 나았다는 데서 붙여진 말이다. 또 쓴맛이 강해서 국을 끓이려면 여러 번 우려내느라 먹기도 전에 지친다 하여 생겼다고도 한다. 어린잎은 냉이와 비슷하고 꽃은 엉겅퀴와 닮았다. 향도 없고 예쁘지도 않아 눈에 잘 띄지 않는 꽃으로 들판을 터전으로 산다.

엉겅퀴는 지칭개와 피는 시기와 연보라색의 꽃과 모양이 비슷하다. 지혈의 효능이 있는 것도 같다. 하물며 속내도 고독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둘을 헷갈려한다. 다른 모습이 있다면 잎과 가시에 있다. 뾰족한 잎에 날카로운 가시를 가져 표독스러워 보인다. 꽃은 더 화려하고 예쁘다.

우리에게 정원이나 화단에서 고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엉겅퀴가 스코틀랜드에서는 대단한 대접을 받는 꽃이다. 적군의 첩보원이 성 밑에 난 꽃의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성내의 병사들이 깨어나 그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때부터 나라를 구했다 하여 국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꽃은 비슷한 게 많아 소통이 잘 되는 친구사이 같다. 소녀 시절의 순화와 나도 이러했으리라. 서로 한 번도 다툼이 없이 지낸 데는 대조적인 성격도 한몫한듯하다. 그 애는 공무원인 아버지에 과수원이 있는 언덕 위의 하얀 2층 집에 살았다. 좋은 배경은 그녀를 당당하고 도도한 성격이게 했고 가난한 집안의 나에게는 가시 하나도 허락되지 않았다. 포기하고 접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저절로 온순한 성격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칭개 같은 나와 엉겅퀴인 그녀는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다. 환경만 틀릴 뿐 닮은 점이 많아 잘 통해서 붙어다녔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종일 웃고 떠드느라 지는 해가 아쉬워 깜깜해져서야 헤어지곤 했다. 그래도 마음에는 늘 부러움이 존재했다. 그나마 공부로 열등감을 따라잡으려 애를 썼던 학창시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는 길이 갈리면서 마음까지도 갈라졌다. 결혼을 하여 엄마가 되고 나이를 훌쩍 먹어 그때의 기억이 가뭇하다. 흰머리도 올라오고 약봉지가 늘어나는 이제 와서야 그녀와 닿았다. 뾰족하게 세웠던 가시가 풍파에 퇴화되어 지칭개가 되어 있었다.

인간사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하다.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흔들려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면서 여기까지 흘러온 세월이다. 이제는 지칭개로 살아도 될 나이이다. 자신으로부터 씨앗을 갓털로 모두 날려 보낸 뒤 고사초가 되어 생애를 마감하는 지칭개. 우리의 자화상이다.

바람이 불어온다. 갓털이 한 생을 품고 하얀 풍등이 되어 어딘가로 떠나간다. 눈 배웅을 하며 천 년으로 이어지는 질문을 던져본다. 인연 따라 피었다가 지고 또 피는 우리들의 윤회(輪廻)는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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