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옛 단양관아의 누정, 봉서정(鳳棲亭)
되살아난 옛 단양관아의 누정, 봉서정(鳳棲亭)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19.06.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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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조선시대 남한강이 지나는 영춘, 단양, 제천, 청풍의 네 고을을 경치가 뛰어난 네 개의 군이란 뜻으로 사군(四郡)이라 묶어 부르며 수많은 문인 묵객들이 찾아와 많은 시문과 그림을 남겼다. 남한강변의 수려한 절경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이 네 고을을 사군산수로 지칭했다.

사군지역은 남한강이 관통하고 있어 수량이 풍부해 일찍부터 뱃길에 의한 교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던 지역이다. 교통 중심지로서의 나루가 중요 고을마다 존재하고 인천이나 한양 등에서의 물류가 이 강을 따라 올라왔다. 또한 이 일대의 토산품이 역시 강을 따라 한양 등지로 운반되었다.

사군 중 특히 단양이 더 주목받았다. 단양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글은 15세기부터 확인할 수 있는데, 사림파 문인 김일손(馹孫, 1464~1498)이 지은 「이요루 관련 기록(二樂樓記)」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글에서 청풍과 단양의 경계를 이루는 현재의 옥순봉과 구담봉, 가은암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을 단구협(丹丘峽), 즉 신선(神仙)이 머무는 공간으로 명명했다. 이후로 많은 문인 묵객들이 단양 산수 관련 기록을 남겼다.

유흥상경(遊興賞景)이라는 누정 본래의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단양의 산수에는 많은 누정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단양의 누정은 기록에만 남아 있는 것, 현재까지 전하는 것, 근래에 세워진 것 등 모두 합해야 15개 남짓이다. 경치는 좋은데 유흥할 대상자 즉, 권세와 부를 가진 사대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남아있는 누정의 숫자가 적은 것으로 이해된다.

봉서정은 20세기 초반까지 모습을 보였던 단양의 대표 누정이다. 봉서정은 조선 선조 35년(1602) 단양군수 이준(李埈, 1560~1635)이 당시의 읍내면 아래쪽 남한강 지류인 단양천변에 창건하였으며, 영조 말인 1764년부터 1769년까지 단양군수였던 조정세(趙靖世)가 위치를 옮겼고 1854년(철종 5)에는 심원택((沈遠澤) 군수가 보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7년에 촬영된 사진자료에 따르면 당시 목교였던 우화교 건너 좌측편 단양천변에 10칸 규모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언제 철거되었는지 알 수 없다.

봉서정의 위치와 모습에 대해서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구학첩(丘壑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3년 구학첩이 새로 발견되어 겸재 정선의 13번째 화첩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며 이 화첩의 3폭 그림 가운데 하나가 단양의 「봉서정도(鳳棲亭圖)」이다.

이 그림을 보면 봉서정은 단양 옛 관아의 누정으로서 확연하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단양천변 높은 축대 위에 봉서정이 있고 그 곁에는 2층 누각인 이요루(二樂樓)가 있다. `봉서정'은 봉황이 깃드는 정자라는 뜻이니 단양이 선경(仙境)임을 은근히 내세운 것이고, `이요루'란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나온 것이니 단양의 풍광을 즐기는 누정 이름으로 삼아 과할 것이 없다.

관아의 누정이 둘이나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 누정에 오르는 일이 많았다는 얘기다. 워낙에 타지에서 오는 손님이 많아 그분들을 따로 모시기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그 누정 뒤로 보이는 것이 바로 관아의 건물들이다. 겸재의 눈에 단양 관아의 핵심적 이미지는 객사와 동헌이 아니라 두 누정에 있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최근 단양군에서는 당시 단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누정인 봉서정을 복원하였다. 충주댐 건설로 인한 지형변화 등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역사자료에 근거한 사실적인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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