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권력
공간의 권력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9.06.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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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도시가 자란다. 자고 나면 쑥쑥 자라는 나무처럼 회색 건물로 빼곡하다. 생명도 없는 이 회색 나무는 어디까지 자랄 것인가. 점점 공간을 앗아가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상 비좁은 도시의 속성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이따금 숨이 턱턱 막힌다. 똑같은 구조와 건물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은 소유한 만큼의 부채들이다. 개인이 느끼는 만족 체감도는 과거에 비해 풍요롭지 않다. 절대 행복을 잃은 이 공간은 단지 타자와의 비교를 통한 조율된 행복만 있을 뿐이다. 되뇌어 반추할 놀 빛 추억을 만들어 낼 정서적 사유와 아날로그 공간에서의 놀이가 실종된 터이다.

홍익대 건축과 유현준 교수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기준을 바꾸다'라는 부제로 『어디서 살 것인가』를 통해 공간이 실종된 도심과 건축물이 지닌 권력에 대해서 피력했다. 건축물의 권력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진행돼 왔다. 돌로 만든 무덤인 어마어마한 고인돌조차도 자기 부족원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타 부족 견제용이었다는 것과 빚을 내면서까지 높은 건물을 올리려는 건물 권력의 속성에 눈이 떴다. 고임돌과 덮개돌을 옮기려면 부족 전체가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곧 그것은 부족의 힘으로 해석된다. 건물 권력은 안팎 견제라는 이중 속성을 지니지만 위용을 부리는 건물엔 자연스러운 건축미나 아름다움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온기와 정서 드리운 건물엔 뜨거운 숨을 느낀다.

나는 이따금 늦은 밤이면 옹기종기 모인 주택 사이로 난 골목길을 걷는다. 가로등 불의 고요함과 길게 드리운 몸의 그림자와 또닥거리는 발소리를 음악 삼아 빛바랜 정서를 충천한다. 담장을 타고 넘는 붉은 장미덩굴 앞에선 나도 모르게 콧노래다. 신혼 초 골목의 새댁들과 집 앞에 돗자리를 깔고 도란도란 삶을 이야기하던 그 따스함과 정겨움이 그립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어울려 흙장난하고 젊은 엄마들은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대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사는지…….

유현준 교수는 미국에서 유독 혁신 기업들이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나오는 이유는 지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저층 건물이어서 친구 관계는 세 배나 많고, 세 배 더 많은 생각의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는 이유를 들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푸른 숲과 마당 같은 아날로그 공간에서의 생활은 큰 장점이고 재산이다.

고층 건물 빼곡한 도심에선 몸은 편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끊임없이 요구하는 자본주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고이면 병이나 화가 되는데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풀어낼 돌파구도 막막하고 묘연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머리를 맑게 할 것인가, 머리는 늘 무겁지만, 몸을 편하게 할 것인가. 육체와 정신 중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살 것인가. 직업 관련 속성상 경제적 거리를 위해 도심의 아파트에 살지만 도심에서 누릴 수 없는 정서적 가치를 위해 인근 20여 분 소요되는 거리에 여섯 평 정도의 미니멀 농막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그곳을 찾아가는 길이 소풍이다. 푸른 하늘과 진초록 들녘 한가운데서 새소리, 개구리 소리, 냇물 소리를 들으며 내 안의 무거운 쇳내를 정화한다. 노랑 거미가 짜놓은 조밀한 건축물 사이의 이슬방울로 놓친 시간을 길어 올리며 훗날에 남길 감빛 추억을 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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