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것의 힘
즐기는 것의 힘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6.2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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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모든 일상의 일들에 대한 기억을 끝내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어떤 기억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행복하거나 때론 불행하게 하고, 아쉽거나 흐뭇하게 하기도 한다.

토요일이었던 지난달 25일 대 포르투갈전을 시작으로 23일 동안 온 나라를 설레게 했던 U-20 월드컵의 기억 역시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 희열의 정도가 벌써 옅어지고 있다.

첫 경기에서 아쉽게 패배한 탓에 큰 기대를 모으지 못했던 한국의 미성년 선수들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승승장구를 거듭해 마침내 한국 축구 사상 첫 월드컵 결승에 오르는 쾌거를 만들어 냈다. 이를 두고 상당수의 언론에서는 `신화'를 들먹일 만큼 극단적인 찬사를 쏟아냈고, 그 주인공들은 성대한 환영식과 더불어 청와대 만찬에 초청되는 신나는 경험을 맛보기도 했다.

한국시간으로 일요일인 지난 16일 새벽 1시부터 열린 우크라이나와의 결승전은 우승에 대한 벅찬 희망으로 온 밤을 홀딱 새워도 아깝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날 경기 중계를 보는 도중에 무언가 달라진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3대 1로 패한 결과는 차치하더라도, 조별리그와 16강, 8강, 4강에 이르는 경기의 과정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성년이 되지 못한 어린 선수들은 그동안의 경기에서 축구계의 흙수저 정정용 감독의 주문대로 `멋지게 한 판 놀며 즐기는 축구'를 해왔다. 숱한 어려움을 뚫고 결승까지 힘들게 오르면서 바닥난 체력 때문에 그 전 경기와는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이해도 있다. 그러나 상대팀 역시 우리와 똑같은 과정을 겪었으므로 그런 일방적 너그러움은 평등하지 않다. 나는 그보다 선수들의 움직임에서 결승까지 오른 마당에 꼭 우승해야겠다는 목표의식으로 지나치게 힘이 많이 들어가 있고, 이에 따라 플레이 자체가 경직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읽었다. 한마디로 그전 경기와는 달리 `즐기는 힘'이 빠진 경기를 보며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손흥민은 지금까지 한국축구 역사상 유례없이 걸출한 선수다. 입단조차 하늘의 별따기처럼 여겨지는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 리그에서 주전 공격수로, 팀 내에서 가장 승리의 공헌도가 높은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경탄스러운 일이다.

그런 손흥민이 한국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든든하다. 그러나 국가대표팀 간의 경기인 A매치에서의 손흥민은 볼 때마다 안타깝다. 엄청난 연봉을 받는 프로축구 리그에서 발휘되는 절정의 기량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프리미어 리그에서의 동료들은 기량이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세계적이어서 그렇고, 지극한 자본의 시장에서 반드시 돈값어치를 해야 하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라는 배경도 자극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혹시 손흥민이 돈벌이가 되지 않는 국가대표팀 간 축구경기에서 `조국과 민족'그리고 `국민'의 이름 앞에 더 간절하게 잘하려고 하는 경도된 애국심과 이타심이 그를 옥죄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씩 쓸데없는 고민을 하곤 한다.

한때 국보급 농구선수로 호칭되던 예능인 서장훈이 어느 TV프로그램에서 고백한 말이 경이롭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절대 믿지 않는 선수 생활을 했다. 한 경기 한 경기를 물러날 수 없는 전쟁처럼 치르며 살았는데 어떻게 즐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투철한 프로근성으로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나는 하마터면 그를 존경할 뻔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선수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농구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즐거움이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음을 그 역시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영화 가운데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화 중 하나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 “카르페 디엠”은 위기의 순간 자동으로 백업되는 유전자처럼 내 가슴에 담겨 있다.

2019년도 절반이 지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저 즐기는 힘. 그 부드러움으로 올해의 나머지 절반을 맞이하는 한 여름. 하지가 지난 낮은 벌써 짧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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