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생각 - 큰 나무
일상 생각 - 큰 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 팀장
  • 승인 2019.06.2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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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 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 팀장

 

늦은 감이 있지만, 겨우내 답답한 실내에서 숨쉬기조차 힘들었을 행잉플랜트를 밖으로 냈다. 고온 다습한 밀림에서 자생하는 식물군인데, 건조하고 추운 객지에서 적응하려다 보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아래로 늘어지는 행잉플랜트의 특성상 그늘이 지면서도 습도를 맞추어 줄만 한 곳을 찾아 이주시킨다. 마땅한 장소를 찾았다. 역시 잎이 우거진 감나무 밑이 적당한 듯하다. 잎이 우거져 제법 그늘진 가장 아랫단의 굵은 가지 중간에 철사로 걸이를 만들어 걸쳐 놓았다. 무른 가지라 생각했는데 무거운 것을 달고도 휨 없이 듬직하다.

가느다라고 보잘 것 없는 한 가닥이 오랜 시간의 연륜을 더해 제법 커다란 나무로 자랐다. 약한 가지 같지만 나름 강한 척, 많은 가지 중 한 가지는 덩굴식물인 클레마티스에게도 내주었다. 감나무가 보라색 벨벳 같은 커다란 꽃을 달았다. 커다란 감나무는 양분을 올려 자체적으로 녹음을 짙게 하고 그 주변으로 많은 것을 거두어 들였다. 아름드리는 아니지만 나름 육중한 나무 옆, 돌 틈에 부처손이 두툼한 잎을 겹겹이 만들어 풍성함을 넘어 군락을 확장한 기세이다.

바로 옆 곧 꽃대를 올릴 듯 상사화는 잎을 거둬들였다. 그 사이를 달달하면서도 묵직한 향을 연신 품어내는 흰 백합과 나리들이 색색의 자태를 뽐낸다. 구근류는 물 빠짐이 좋고 반그늘이 있는 곳을 점하고 꽃을 피워 향을 품어낸다. 봄에는 수선화와 튤립, 히아신스가 피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는 나리류가 색을 드러낸다. 하늘나리, 중나리, 말나리. 그 밑으론 우산이끼가 적절한 습도조절의 역할을 담당하듯 군생한다.

서너 평정도 되는 면적에 참 많은 것이 모여 산다. 심지어 커다란 감나무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한 부분을 송충이에게 먹거리로 제공하고 있다. 반그늘을 좋아하는 것들은 감나무 아래로 모여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도 계절별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수국도 한자리하며, 토양의 적절한 습은 이끼가 담당한다. 상호의존하면서도 각자의 역할을 한다.

감나무 밑은 늘 조용하지만 서로 의지하면서 조화로운 터를 만들고 있다. 꽃이 피어 벌을 불러들이는 시간조차, 주변의 새들이 쉬어가며 배변을 보는 시간. 이끼가 땅 위에 녹색 옷이 되어 토양과 어울려 좋은 기운을 품어내니 녹음방초다.

모든 것들은 저마다 목소리로 말하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를 드러낸다. 큰 나무는 모든 것을 다 살린다. `다사리'다. 큰 나무는 자리를 차지한 듯하나 내어주고자 하는 자리다. 내어 주면서도 모든 것을 거두고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존재다. 위엄과 위용이 있으나 위세를 보이지 않고, 모두 품고 다 살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주는 존재다. 통제나 대립의 구도가 아닌 배려하고 보듬어주는 것만이 존재 이유인 듯하다.

큰 나무는 조용하다. 각각 나름의 가치를 조화롭게 하고 하나로 만들어 순응한다. 굳이 미적 범주의 하나인 우아미를 언급하지 않아도 다른 미적인 가치까지 충분히 발현된다. 자율적 삶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각각의 방식을 최대한 조화롭게 구성하며, 보이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몸짓으로 영위하는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축소된 숲이다. 나뭇잎 사이로 다른 식물계에 햇살의 무늬를 전하고, 흔들리는 것에 소리없는 율동을 끌어낸다. 물이 오름에 고루 분배하고, 다른 것에 의해 보존케 하며, 떨어진 나뭇잎은 각각의 것에 양분되게 한다. 식물도 보이지 않는 투쟁의 연속 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미 커버린 나무는 베풀고 상생하는 습성을 갖는다. 너무 커버려 둥치가 썩으면 동물계에 자리를 내어주면서까지 큰 나무는 자존심, 정체성을 고스란히 지켜낸다. 그래서 큰 나무가 된 것이다. 큰 나무는 작은 나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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