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충성관
윤석열의 충성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6.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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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당나라 황제 태종이 고위직 인사를 단행했다. 재상 위징(魏徵)이 “부적격자가 있다”며 집행을 차일피일 미룬다. 열 받은 황제가 거듭 독촉을 하지만 위징은 요지부동이다. 한술 더 떠 새로운 인사안을 만들어 올린다. 뚜껑이 열린 황제는 문서를 발기발기 찢어 위징의 면전에 날린다. 주섬주섬 종이 조가리들을 주워 나간 위징은 문서를 풀로 붙여 다시 황제에게 올리며 재가를 요청한다. “이 고집불통 늙은이를 당할 수가 없구나”. 태종은 쓴웃음을 지으며 위징의 인사안을 처결했다.

이 고사를 떠올린 것은 최근 유명해진 말 때문이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윤석열 검찰총장 내정자가 6년 전 국정감사장에서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임명권자보다 조직과 소신에 충실하겠다”는 말로 해석했다. 그리고 나서 이런 공직관을 실천하고도 자리보전을 한 참모가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했고, 간신히 떠올린 것이 태종과 위징의 사례였다.

사실 가장 먼저 생각난 인물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부하의 이견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질게 응징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지도자다. 몇몇 외교 문제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결이 다른 의견을 제시한 틸러슨 국무장관은 대통령의 트윗을 통해 자신의 해고를 확인해야 했다. 장관이 교체된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성명을 낸 차관도 곧바로 잘렸다. 트럼프의 아킬레스건인 러시아 스캔들 수사에 착수한 코미 FBI 국장은 뉴스를 보고 자신의 경질 사실을 알았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지난 정권의 문체부장관 한 분은 해외 출장 중에 경질을 통보받았다. 눈밖에 난 문화예술인과 단체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조금으로 장난질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청와대에 진언한 직후였다.

다시 윤석열로 돌아가자면, 그는 자신의 말을 실천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직속상관이 `사람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가 앙갚음을 당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도, 같은 길을 고집하다 불이익을 당한 미련스러운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윤 내정자는 지난 2012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수사를 주도할 당시 특별수사팀장을 지냈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국정원으로부터 불법적인 도움을 받은 사실을 캐겠다고 검찰총장이 앞장을 섰으니 청와대는 황당했을 것이다. 수사팀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구속까지 검토할 정도로 사태가 긴박해졌을 때 채 총장의 혼외자 건이 터졌고, 그의 하차로 이어졌다. 그가 국정원과 청와대의 공모에 의해 낙마했다는 당시의 추정은 사실로 굳어가고 있다. 당시 채 총장의 과거를 캐기 위한 불법 정보수집에 국정원과 청와대 직원들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고, 기소된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은 최근 3년형을 구형받았다.

윤 내정자는 채 총장의 몰락을 곁에서 지켜보고도 출세하는 요령을 체득하지 못했다. 채 총장이 떠나고도 수사를 밀어붙였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구속수사를 주장하며 윗선과 대립했다. 급기야 상부 보고도 없이 국정원 직원들을 체포하고 자택 압수수색을 강행하다 직무배제를 당했다. 이후 1개월 정직 징계를 받고 한직을 전전했다. 징계에 앞서 국감장에 나가서는 외압을 폭로하고 “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 충성한다”는 말을 남겼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불법 정치개입 등으로 지난해 4년형을 확정받은 데는 윤 내정자의 소신이 작용했다.

엄밀하게 말해 위징이 소신을 관철시켰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위징의 소신은 그의 충정을 알아준 태종이 완성시킨 것이다. 태종의 넓은 리더십이 없었다면 그는 올곧은 충신이 아니라 주제를 모르고 설치다가 목을 잃은 돈키호테 정도로 평가됐을지 모른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 내정자의 신념이 죽고 살고는 대통령에 달려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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