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인의 길, 미호천
구석기인의 길, 미호천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06.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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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작천(鵲川), 동진(東津)으로도 불리우는 미호천은 길이 89.2km로 금강 본류로 유입되는 지류들 가운데 유역면적이 가장 크고 유량 또한 풍부한 물줄기이다. 미호천의 물줄기가 처음 시작된 곳에 대하여 여러 설이 있으나 기록이나 현지답사를 통해 음성 마이산이 유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진안의 마이산이 섬진강의 발원지라면 음성의 마이산은 미호천의 발원지인 셈이다. 이곳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한 미호천은 백곡천, 초평천, 보강천, 무심천, 율량천, 병천천 등의 지류를 포함하며, 상류부에 진천평야, 증하류부에 미호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그렇다면 미호천에 언제부터 사람의 발길이 닿았는가? 미호천 물줄기를 따라 거닐었던 최초의 사람은 누구인가? 고고학 조사결과로 보면 구석기시대의 곧선사람(homo erectus)이 미호천에 첫발을 내디뎠음을 알 수 있다. 미호천과 그 지류들의 둘레 지형은 해발 100m 이내의 낮은 구릉이 널리 분포하고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환경조건을 제공해준다. 특히 미호천과 지류 또는 지류와 지류가 만나는 두물머리, 구릉 경사면의 끝자락 부분, 작은 구릉 사이의 곡간부 등에 구석기시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구석기인들의 오랜 삶의 흔적이다. 지금까지 미호천과 그 지류에서 50여 곳의 구석기시대 유적들이 찾아졌다. 이동생활을 하며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야 했던 구석기인들에게 미호천의 물줄기를 끼고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각종 자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미호평야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터전이라면, 미호평야 언저리는 구석기인들에게는 삶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진천 장관리·송두리유적, 증평 사곡리유적, 청주 만수리·오송·봉명동·율량동·서촌동·복대동·송절동·소로리·석성리유적 등이 미호천의 대표적인 구석기유적들이다. 이들 유적은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석기시대의 전시기에 걸친 문화를 포함하고 있다. 미호천을 배경으로 오랜 세월 동안 구석기인들이 삶을 꾸려왔음을 보여주는 고고학 증거들이다. 특히 대부분 구석기유적이 서로 다른 시기의 문화가 중복되어 있음은 미호천을 따라 이동하며 주기적으로 점유하여 생활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구석기인들이 미호천에 처음으로 삶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이동생활, 채집, 사냥, 석기제작, 불의 사용, 막집생활, 예술, 주검 묻기 등이 구석기인의 생활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먹고, 입고, 자는 것뿐 아니라 그 속에는 그들의 지혜와 기술도 포함되어 있다. 먹거리를 얻기 위한 도구의 재료는 미호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계 암질을 선택하여 제작한 생활의 지혜와 효율적인 석기제작을 위해 적용된 기술의 발달과정을 통해 미호천에 살았던 구석기인의 문화가 훌륭하였음을 보여준다.

세월은 강을 변화시킨다. 물의 침식, 운반, 퇴적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강은 변화되고 있다. 이는 일시에 변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변화시킴으로 마치 세월이 강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미호천도 그렇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많이 변화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 남긴 구석기인의 삶의 흔적은 변함이 없다. 미호천을 따라 구석기인이 오르내리며 생활했던 흔적들이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들 유적을 위치, 시대, 성격, 기능 등으로 구성해보면 미호천을 따라 거닐었던 구석기인의 길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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