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향수
기생충과 향수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6.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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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내가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다가 별거 아닌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탓에 지청구를 듣던 내 감정선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가슴이 답답하거나 우울할 때 눈물을 흘려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혼자 영화관을 찾기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내가 아닌가.

영화관의 짙은 어둠에서 빠져나왔을 무렵부터 눈물샘은 터지고 말았는데, 그 눈물의 원인이 `분노'였고, `서러움'의 일종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짙은 어둠에서 벗어나 환한 세상을 만났을 때의 눈부심처럼 갑자기 장사익의 노래 <찔레꽃>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들판에, 사람 사는 세상에 지천으로 피었던 찔레꽃은 하마 지고 없는데,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서 울고, 목 놓아 울고, 밤새워 울었던 쓰라린 가슴이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로 서럽다. 냄새와 향기는 뚜렷한 신분의 차이가 있다. 향기는 고급이고 냄새는 천박하다.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이 그런 인식의 차이를 뚜렷하게 하고 있다는 거다. 절대로 붉게 피지 않는 찔레꽃을 두고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이라는 노랫말을 고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지고 보면 향기처럼 인간사를 잔혹하게 만든 욕망도 드물다.

“그녀의 땀은 바다처럼 상쾌했고, 머리카락의 기름기는 호두 기름 같았으며, 국부는 수련 꽃다발의 향기를, 그리고 피부는 살구꽃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풍부하고 균형이 잡힌 신비로운 향기였기 때문에 그르누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맡아 본 모든 향수와 그 자신이 상상 속에서 장난삼아 만들어 본 향기의 건축물들이 한순간에 아무 의미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장편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향수는 인간의 절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영양소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인간들을 열광시킬 최고의 향수를 만들겠다는 욕망에 휩싸인 향수제조사에 대한 이야기다. 그 향기는 결국 인간의 체취. 이를 최고의 향수로 만들기 위한 엽기적인 연쇄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는 정작 18세기 프랑스의 냄새 나는 생선시장에 태어나자마자 사생아로 버려진 태생적 신분의 인물이다.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스멀스멀 넘어서는 냄새조차 용납할 수 없는 가진 자의 모욕적 차별을 부각시키는 영화 <기생충>의 욕망은 생선시장과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향수의 잔혹함만큼 뚜렷하다.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썩은 무말랭이 냄새? 행주 빠는 냄새? 지하철을 타다 보면 나는 냄새 있어...” <기생충>의 가진 자(그는 첨단 IT기업의 사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첨단 지식을 바탕으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졸지에 성공한 인물로 추정된다)는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한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형체를 띠지도 않는 냄새일지라도 자신이 구축한 풍요롭고 향기로우며, 윤택한 공간으로 스며드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

그 냄새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말한다. “냄새는 사람들 간에 굉장히 사적인 영역 중 하나다. 냄새는 그 사람의 현실과 처지를 보여준다. 하루종일 고된 노동을 하면 몸에서 땀 냄새가 나기 마련이고, 서로의 냄새에 대해서는 예의상 잘 얘기하지 않는다. 그 인간에 대한 예의가 붕괴되는 순간에 대해서 다룬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서 최고의 향수를 얻기 위해 냄새의 영역에 해당하는 인간의 체취를 빼앗아야 하는 향수제조사 `장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욕망은 주인공의 성취욕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타인의 몫이다. 그로인해 그가 신분이 상승했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기야 세상의 모든 식민과 모든 수탈, 그리고 학살의 시작이 기껏 향신료를 얻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으니, 냄새마저 경계를 침범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는 세상을 눈물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모든 인류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의 처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모두에게 애절한 사람냄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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