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먼저 읽는 축구
세상을 먼저 읽는 축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6.11 20: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주민들과 늦은 밤까지 도시재생 뉴딜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걸어서 귀가하다가 청주대 부근에서 축구 명문 청주 대성고의 남기영 감독을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밤 라이딩을 하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반가워한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탓에 그런저런 해묵은 인사를 나눈 뒤, 남 감독이 속상해하며 털어놓은 말은 뜻밖에도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대성고가 지난 9일 경남 창녕 스포츠파크에서 열린 제24회 무학기 고교축구대회에서 승부차기 끝에 8강에서 탈락했다는 것이다. 대성고는 지난해 이 대회 우승팀이다.

놀라운 것은 대성고 축구팀은 맞붙은 용인태성FC와 팀당 무려 31명의 선수가 승부차기에 나서는 진기록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유튜브 동영상에서 이 장면을 찾아봤더니 승부차기에만 무려 51분 54초의 러닝타임을 기록하고 있다.

대성고는 결국 28대 29로 석패를 하고 말았는데, 이는 국내 공식대회 가운데 가장 많은 선수가 승부차기에 나선 기록이다.

축구에서의 승부차기는 심리적 압박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것이다. 아직 어린 고교 축구선수들이 그런 심장이 벌렁거리는 순간순간을 무려 1시간 가까이 견뎌 낸 것은 그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 지역 언론에서 이런 소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과정은 그냥 무시돼도 되는 것이고, 화려한 성과를 거두었을 때에만 눈길을 주는 세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어서 씁쓸하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는 시간에 U20 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의 결승 진출은 결정이 됐을 것이고, 나는 여러분들처럼 어젯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새벽을 기다렸을 것이다.

지난 일요일 새벽 막내 형으로 불리는 이강인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U20 축구대표팀은 국민들의 심장을 여러 차례 들었다 놓았다.

나는 이 경기가 기존의 기득권 축구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연장 전반 역전에 성공한 U20대표팀은 내 예상과는 달리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일부러 시간을 끌지도 않았고, 공을 바깥으로 마구 차내며 오로지 지키려는데 급급하지 않았다.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바람에 막판 동점골을 허용하며 심장을 쫄깃하게 했다. 그러나 그런 당당함으로 우리의 미래 축구는 세계 축구사에 가장 극적인 재미를 만들어 내는 진면목을 발휘했다. 단지 이기는 축구가 아니라 즐기는 축구를 통해 `천재는 노력을, 그 노력은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했다. 각성하라! 이기는 것에만 골몰하는 기성세대여!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몇 차례 중단시키는 비디오 판독(VAR)은 축구가 세상을 먼저 읽고 있음을 판단하게 해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전까지 나는 VAR에서 R을 `Record'쯤의 의미일 것이라고 추정해 왔다. VAR은 Video Assistant Referee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녹화보조심판이 되겠는데, 단순히 기록이 아니라 심판을 도와주는 기계장치를 일컫는 것이다.

영상녹화장치를 통해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소환, 즉 일종의 불러내기이다. 인간이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는 양심과 눈속임을 일시 정지시켜 기계장치에 의해 판가름한다는 것은 AI시대로 빠르게 진화하는 세태에서 진실을 더 이상 인간의 판단에만 의존할 수 없음을 선도하고, 예고하는 일이다. 우리도 (반칙이)인정되었고, 상대팀 역시 VAR에 의해 시정되었으니 심판의 편파판정이라거나 오심 따위의 시시비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이를 마냥 행복한 일로 여겨야 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문: “모든 혁신은 기득권과 충돌하기 때문에 … 그런 기득권에 대한 반발은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답: “회의할 때 서로 `마음을 열고 경청하는 것'과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핀란드 알토대 총장과 주고받은 대화가, 세상을, 그리고 시대를 먼저 읽는 축구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정의에 대한 판정은 진정 기계의 몫이 될 것인가.

마음껏 즐기면서 얼마든지 우승을 꿈꾸는 미래 한국 축구 파이팅!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