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 사람'을 기억하세요
`그 한 사람'을 기억하세요
  •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 승인 2019.06.11 20: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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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의 위대한 희생을 기리는 이 한 달간의 기간은 평소 `애국'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치부하며 바쁘게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그나마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기회의 시간이다.

우리는 이 기회를 단순히 현충일 하루, 사이렌이 울리는 그 시간 묵념 한번으로 끝내기보다는 잊혀가는 그 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추모해야 할 `그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한 사람'은 위인전의 주인공이 아니다. 길가에 피어난 들꽃처럼 돌아보지 않으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이들, 현충원 한 켠에 그저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 이들이다.

잠시 시간을 돌려 고려시대에 있을 `그 사람'을 돌아본다. 몽골의 제5차 침입시기인 1253년, 70여 일간 충주산성에서 몽골군과 대치한 김윤후 장군과 `그 사람'은 먹을 것도 무기도 바닥이 난 상태에서 힘겨운 항전을 이어 나가다 결국 값진 승리를 얻어냈다. 이듬해인 1254년 9월에도 또다시 몽골의 공격이 있었으나 `그 사람'은 굳건히 성을 지켜냈다. 김윤후와 함께 성을 지켜낸 `그 사람'은 바로 이름조차 남지 않은 충주성의 백성이다.

350여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그 사람'은 임진왜란 직후 청주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한양으로 가는 중요 거점이었던 청주성이 왜군에 의해 함락당했다. 그 후 3개월 만에 의병장 조헌과 1,600명의 의병들은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병·승병·관군이 이루어 낸 최초의 읍성탈환이었고, 이 승리로 인해 연전연패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 조선의 수많은 관군과 의병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었다. 여기에는 박춘무가 이끈 청주향병들도 참여하여 막대한 공을 세웠지만 박춘무를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다.

20세기 초에도 `그 사람'은 있었다. 1907년 음력 11월, 38살의 김성권은 1910년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았다. 훗날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애족장을 추서하려 하였지만, 사망일도, 묘소도, 그에 대한 어떤 정보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그는 이름이나마 남아있었지만, 얼마나 많은 `그 사람'들이 그와 함께하며 장렬히 산화되었을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충북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공훈을 받은 이가 520명이다. 전국 유공자가 15,454명인 것을 보면 그 수가 미미한 편이다. 독립운동 유적지는 183곳으로 이 역시 전국 대비 8%에 불과하며, 그나마 이 중 3/4가량이 멸실되고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그 사람'을 잊고 살아가는 걸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먼 이름일지도 모르는 `그 한 사람'은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였고 형제·자매였으며, 따뜻한 이웃이었다. 호국보훈의 달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 한 사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국가적 문제 앞에 나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나아가 나라를 생각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마중물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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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훈 2019-06-12 08:23:36
좋은 글이네요. 호국보훈의 달을 다시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