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또 한 송이 나의 모란
유월, 또 한 송이 나의 모란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19.06.10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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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수년 전 세상을 떠난 나의 할머니는 동구 밖 사오리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셨다. 할아버지께는 억척스런 아내로, 며느리에게는 고집불통 독한 시어머니로, 그리고 손주들에게는 무섭고 인정없는 할머니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조근조근 집안 살림을 살피고 건사하기보다는 대부분 시간을 산으로 들로 밖으로만 나돌았다.

항상 그렇게 저돌적이고 성격 괄괄한 할머니에게도 한 가지 여성스런 취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꽃을 가꾸는 일이었다. 봄이면 앞마당 작은 화단에 봉숭아와 백일홍, 맨드라미 등 온갖 꽃씨를 뿌려 마당가득 새 생명을 들였다. 그리고 형형색색 채송화 새싹을 이곳저곳 공간을 메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장독대가 있는 옆 담장 밑에는 붉은 빛깔 모란이 피었는데 할머니는 그 많은 꽃 중에서 이 모란을 가꾸는데 온갖 정성을 들였다. 칼날 같은 추위가 긴 강원도라 한겨울을 잘 버텨내도록 짚을 엮어 옷을 입혔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햇빛 그늘막부터 설치했다. 모란은 햇빛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 잘 시들어 한낮에는 꼭 그늘막을 쳐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해 사랑으로 보듬으니 다른 지역보다 늦긴 했어도 꽃은 언제나 이름대로 그 화려함을 제대로 뽐내며 곱게 피어났다.

할머니가 모란을 키운 건 할아버지께서 그 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오랜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집안에서만 지내는 날이 대부분인 할아버지는 모란이 붉은 해처럼 뜰 안에 가득히 피어오를 때면 어떻게 해서든 마당까지 걸음을 내디뎠다. 흔들리는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모란을 보러 나가려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앙상한 손으로 그 풍성한 모란의 꽃잎을 어루만지며 붉은 기운을 눈에 담으실 땐 언제나 맑은 정신을 유지하셨다. 그렇게 유월의 우리 집 뜰에는 단 며칠 동안이었지만 할아버지와 모란이 함께 공존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간단한 군사교육만 받고 소집영장도 없이 군대에 차출되셨다. 그렇게 떠난 할아버지는 수년 후 돌아오셨는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폐함을 안고 있었다. 어느 학자는 전쟁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든다고 했던가. 역사의 무거운 짐을 진 대가는 혹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가정의 기둥이었던 젊은 가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여름 조그마한 천둥번개 소리에도 귀를 막고 구석으로 숨는, 평생 포탄소리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정신 혼미한 노인만이 남았다.

할아버지가 병객이 되어 돌아온 이후 할머니는 누구보다 강한 가장이 되어 바깥일을 헤쳐나가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 순식간에 집안의 기둥이 되어 모든 짐을 떠안았으리라. 당신들께서 가고자 했던 저마다 마음속 길은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었고 가난이라는 짐을 내려놓을 때까지 온 가족은 고생의 길을 걸었다.

유월. 그 시간은 우리들의 앞선 세대들에게는 전쟁이 남긴 상처의 힘든 기억이 있는 달이다. 우리의 세대는, 혹은 우리 자식들의 세대는 공감조차 어려운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일 뿐이지만 지금의 평안함 뒤에 이름도 없이 스러져 한 줌의 재로 산화한 그 많은 죽음을 기억하고 최소한의 감사는 지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내 유년의 집 뜰 안에 활짝 피어 붉은 물결을 이루는 모란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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