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을과 을의 사투
기생충, 을과 을의 사투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9.06.10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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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연지민 부국장
연지민 부국장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연일 화제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에서 대한민국사상 첫 황금종려상을 품은 이 작품은 어느 영화보다 국민적 관심이 쏠렸다. 그렇게 개봉부터 화려하게 시작한 영화는 열흘 만에 700만이 넘는 관객이 찾을 만큼 이슈의 중심에 있다.

특히 디테일봉이라는 감독의 애칭만큼이나 불필요한 나열 없이 이어지는 줄거리는 나이 오십에 거장 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감독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송강호라는 배우가 끌어가는 이야기의 힘은 앵글이 아닌 현실공간으로 관객을 옮겨가게 한다.

영화는 가난한 자와 부자인 자를 대비시키는 평범한 구조 속에 관객들을 생활이란 공간 속에 밀어 넣고 사방에서 거울을 들이댄다.

2시간이 넘게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 속 인물들은 그래서 `너'이면서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반지하 방과 전원주택을 통해 영상미로 은밀하게 제시되고 있는 햇살과 계단, 냄새는 영화의 키워드다.

이 세 요소는 거미줄처럼 얽혀 수많은 복선으로 자리하고 있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소시민들이 진리처럼 믿었던 이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거짓임을 집을 통해 한눈에 보여준다. 그리고 끝없이 내려가는 철제 계단은 돈에 따라 만들어진 계급구조를, 냄새를 통해서는 누군가에게 느끼는 본능적 거부와 분리를 여실히 드러낸다.

문제는 빈과 부의 차는 보이는 외관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건, 인식하지 못하건 자본이 인간의 내면을 잠식하고, 자본에 기생하게 한다는 점이다. 자본에 종속되어 가는 사회 구조는 을들의 비루한 현실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부와 돈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가난한 을은 또 다른 을과 생존을 두고 사투를 벌이는 모순이 펼쳐진다.

갑과 을의 문제가 아니라, 을과 을의 문제로 풀어가는 전원주택 지하실 신은 영화의 압권 중 하나다. 사업 부도로 주인 몰래 지하실에 숨어 살던 남자에게 송강호 가족의 정체가 탄로 나면서 벌어지는 혈투는 어둑한 지하실 계단으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벼랑에서 살아남기 위한 `을'들의 마지막 안간힘은 극자본주의로 치닫는 우리의 현실이자, 세계 강대국의 민낯임을 감독은 교묘하게 투영시키고 있다.

철학적 사유도 빛나는 대목이다. “이 집 사모님은 착하다”는 아들의 말에 “돈이 많아서 착한 거다. 나도 돈이 많으면 사모님보다 더 착하게 살 수 있다”는 송강호 아내의 말은 기존의 선과 악의 개념과 기준마저 흔들어버린다. 곳곳에 던져놓은 촌철살인의 명대사도 깊이 음미해볼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시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의 문제는 빈과 부의 구조를 넘어서고 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가난한 송강호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면, 두 번째 본 영화에선 송강호 아들 최우식과 부자 이선균과 조여정의 삶이 생각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을과 을의 진흙탕 싸움이 너무 리얼해 보는 내내 분노가 일었던 처음과 달리, 흙탕물이 가라앉은 그 자리에서 사람에 대한, 삶에 대한 생각도 던져준다.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펼치면 지구공동체의 문제로 확산하는 인식의 전환은 을과 을의 사투를 통해 우리가 모두 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을이 될 수 있는 지금,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장면장면이 폐부를 찌른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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