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과 노덕술
김원봉과 노덕술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6.0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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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약산 김원봉 만큼 이력이 돋보이는 인물도 드물다. 그가 1919년 만주에서 결성한 의열단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항일단체였다. 조선총독부 폭파(김익상), 일본 황궁 폭탄 투척(김지섭), 동양척식회사·식산은행 폭탄 투척(나석주), 종로경찰서(김상옥)·부산경찰서(박재혁)·밀양경찰서(최수봉) 폭탄 투척 등이 의열단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대표적 의거들이다. 일경의 끄나풀 구실을 하던 밀정과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1938년 무장단체인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대일 항쟁을 하던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과 국방부장관 격인 군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걸고 이뤄낸 광복은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을 받는' 비운의 시발점이 됐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해방 후 여운형, 허헌 등과 함께 좌파 진영에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남북연석회의 참석 차 김구를 수행해 평양을 방문했다가 그대로 북에 눌러앉았다. 북에서 장관급인 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58년 돌연 숙청됐다.

일제 친일사에서 노덕술만큼 이력이 압도적인 인물도 드물다. 그는 1920년 경남도경에서 순사 생활을 시작했다. 25년간 울산·거창·동래·통영·인천·양주·개성·서울 종로·평양 등의 경찰서를 전전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지사와 학생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고문해 죽이거나 재판에 넘겼다. 독립운동에 눈을 뜬 어린 학생들을 잡아다 족치는 것이 주특기였다. 일제에 동포의 피를 바친 대가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그는 해방 무렵에는 평양경찰서장까지 올랐다.

광복은 그에게 민족적 심판을 내리는 대신 일제 때보다 더한 입신양명의 기회를 가져다줬다. 바로 이듬해 지금의 서울경찰청 격인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됐다. 독립운동을 한 좌파인사들과 이승만 정권과 대치하는 정치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중령 계급장을 달고 군에도 들어가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비록 낙선하기는 했지만 고향인 울산에서 국회의원 출마까지 했으니 미련없이 산 인생이었다.

일제를 공포에 떨게 한 사나이 중의 사나이 김원봉이 해방 후 사흘 밤낮을 꾸역꾸역 울었던 적이 있다. 파업에 개입한 혐의로 노덕술에게 체포돼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풀려난 후 피를 토하듯 쏟아낸 통한의 울음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울음이 도처에서 들렸을 것이다. 친일경찰이 독립운동가를 잡아다 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던 때였으니까. 김원봉이 북을 택한 결정적 이유로 노덕술에게 당한 치욕이 꼽힌다.

경찰에서 승승장구하던 노덕술에게도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친일파 처단을 위해 반민특위가 출범한 것이다. 벼랑에 몰린 노덕술은 청부업자를 동원해 반만특위 요인 암살에 나섰다. 음모는 들통이 났고 바로 특위에 체포돼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됐다. 그를 구명한 것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반공투사를 함부로 구금해서는 안된다”며 방면을 지시했다. 반민특위가 거부하자 경찰을 동원해 특위를 일거에 해체해 버렸다. “반민특위가 국론을 분열시켰다”는 야당 원내대표의 희한한 주장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통합을 강조하며 김원봉을 언급해 한국당 등 일부 야당이 반발하고 있다. 워낙 논쟁적인 인물이, 그것도 6.25 전몰장병 등을 추모하는 현충일 기념식에서 통합의 수범사례로 거론됐으니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한국당 만큼은 독립지사를 때려잡던 최악의 친일파까지 포용한 이승만의 지고한 통합정신을 되새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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