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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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충옥 수필가·청주 성화초 행정실장
  • 승인 2019.06.0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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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류충옥 수필가·청주 성화초 행정실장
류충옥 수필가·청주 성화초 행정실장

 

초여름이다. 밤새 내린 비바람에 몸부림친 장미꽃들이 여린 꽃잎을 질펀하게 토해놓았다. 담장을 꽉 붙들고 손톱 세워 버티고 있는 장미가 기진맥진 지쳐 보인다. 아직도 빗물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물방울을 머금고서 말이다. 환하게 비춰주는 태양 볕을 받은 5월의 장미는 레이스 달린 우아한 드레스에 검은색 긴 장갑을 끼고 도도하게 인사를 하는 연회장의 숙녀이었는데, 이렇게 휘둘린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리운 마음의 상념으로 밤새워 술에 취하고 고통에 절어서 초췌하게 아침을 맞는 방랑자 같다.

시시때때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자꾸 확인하게 된다. 혹시 무음으로 되어 있어 전화벨 소리를 못 들었나 싶어서다.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1주일 전 훈련소에 간 아들 생각에 내 머릿속도 반은 훈련소에 가 있다. `그래~ 주말에나 전화할 수 있게 해준다니 아직 전화를 못 하는 것일 거야'라고 위안을 하면서도 어느새 내 머릿속은 경험해보지 못한 군대 생활의 상상으로 들어간다. `첫 주니까 아직은 실내에서 교육을 받겠지? 빡빡 밀은 머리에 멋을 낸다고 길게 두 줄의 바퀴 자국을 내더니 그것 때문에 연병장을 더 돈 것은 아닐까?' 그저 나서지도 처지지도 말고 중간만 하면서 한 달만 잘 버티고 오라는 부모의 걱정 소리에 모두 평정하고 오겠다고 큰소리치는 허풍이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단 낫겠다는 위안을 하며 나 자신을 달래본다.

드디어 주말. 전화는 언제쯤 오나, 오늘은 꼭 전화하겠지? 그러나 저녁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 보아도 깜깜무소식이니 공연히 서운해진다. 친구들도 많고 친구를 워낙 좋아하니 엄마는 제쳐놓고 친구들에게 전화하느라 엄마 차지가 안 오는 건가? 설마 여자친구가 생겨서 여자친구에게 먼저 전화하느라 내가 밀렸나? 하고 낯빛이 어두워질 때쯤 낯선 번호가 `대한민국 군인입니다'라는 글자를 보이며 반갑게 뛰어온다. 두근거림을 진정하고 받아 드니 반가운 아들 목소리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것 같은데 벌써 끊어야 한단다.

손전화기 없이 공용전화로 정해진 시간에만 사용한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손전화가 보편화하기 전인 20여 년 전, 전화는 공동의 물건이므로 길게 통화를 하면 제재를 받았다. 대학 시절 어쩌다가 남학생에게 전화가 오면 나를 데리고 살던 언니는 누구인지 캐묻고,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친구는 바꿔주지도 않았다. 마음 가는 연인에게 전화하려면 마음속으로 수백 번을 망설이고 전화기 앞을 수없이 서성이며 수화기를 만지작거리고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전화 요금 많이 나간다고 아주 짧게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시고는 대답도 안 듣고 툭 끊었다. 전화는 짧게 대화는 만나서 길게 하라던 시절. 그래서 사람 간의 만남이 더 친근했던 시절이다. 어린 시절 시골 마을엔 전화가 구판장에 한 대만 있어서 누구네 집에 전화가 왔다고 방송을 하면 5분~10분 되는 거리를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전화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스마트폰 안에서 모든 것을 소통하는 시대이다. 찾고 싶은 정보는 물론이고, 받기 싫은 사람의 전화는 가려서 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뭐든 참고 기다리기보단 바로 배설해 버리고는 뒤돌아서 잊어버리는 시대이다. 오랜만에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며 잊힌 설렘을 꺼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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