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리에서
백야리에서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19.06.03 1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유월이다. 러시아에선 올해도 백야 축제가 열릴 것이다. 작년 이맘때 수필 교실 식구들과 러시아문학 기행을 갈까 했다. 몇 년 전부터 꼬박꼬박 자금을 모아서 드디어 구체적인 추진을 했었는데, 짧지 않은 일정인 데다 일일이 여러 사람의 사정을 맞추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 월드컵 기간과도 맞물려서 이래저래 궁리해봤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너무 아쉬워서 삼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가까운 곳에서 일박이일의 특별한 시간을 갖기로 했었다.

총무인 나는 장을 봐서 다른 사람보다 일찍 휴양림에 도착했다. 그런데 회장님과 선생님이 벌써 와 계셨다. 짐을 일단 옮겨놓고 셋이서 식물원 근처까지 산책했다. 막 피어나는 연초록 잎이 꽃보다 고왔다. 통나무집 앞에 심어진 자작나무 몇 그루가 눈길을 끌었다. 그 백야는 아니지만, 이곳이 `백야자연휴양림'이라는 것이 묘하게도 위안이 되었다.

저녁은 회원들이 각자 반찬을 한 가지씩 해서 가지고 오기로 했는데, 십시일반이라고 금방 근사한 한정식이 한 상 차려졌다. 수육이랑 묵은김치, 홍어 삭힌 것, 깻잎장아찌, 여러 가지 제철 나물무침, 채소 샐러드와 과일 등등, 상이 모자랄 정도로 진수성찬이다. 그 중엔 물론 새벽부터 심혈을 기울여 만든 내 도토리묵과 멸치볶음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선생님의 건배사와 함께 술이 한배 돌았다. 외교부장님이 만들어 온 먹태구이 술안주 맛이 일품이었다. 이야기도 한배 돌았다. 첫사랑 얘기, 글쓰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털어놓고, 남편 흉을 보기도 하고, 가슴 속에 응어리진 아픈 사연들도 풀어냈다. 주제도, 형식도 시간도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야기하는 사람과 경청하는 마음들, 오가는 눈빛만 있을 뿐. 술에 취한 건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기분 좋게 무장해제 된 가슴들 위로 새까만 봄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왕이면 여행답게 버스를 전세해서 좀 멀리 바다라도 보고 오자는 의견도 있었다. 반면 가까운 곳에서 일박하게 되면 회원 대부분이 참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손을 들어 결정했는데 후자가 한 표 더 많았다. 후문으로 들은 얘기인데, 그날 ㅂ 선배님이, 꼭 참석하고 싶은데 꼬박 이틀 시간 낼 형편이 안 된다는 우리 교실 막내의 간절한 눈빛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다음날, 막내가 끓여 온 미역국으로 꿀맛 같은 아침밥을 먹었다. 식후에 차를 마시며 `전생'을 화두로 차담을 나누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리가 전생에서 몇 번을 만났기에 이렇듯 특별한 하룻밤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내생에서 우린 어떤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될는지. 인연이라는 것이 형태를 바꿔가며 전생에서 현생으로, 또 내생으로 계속해서 그 끈을 이어가는 것이라면, 좋은 인연은 더 매끄럽게, 악연으로 엉킨 실타래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풀어볼 일이다. 소중한 인연들을 알아본 행복한 시간이었다.

밟기만 해도 영감이 떠오른다는 문학의 땅 러시아에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푸시킨의 발자취를 둘러보고, 신비로운 백야를 경험하고, 무수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자작나무 숲에 가지 못한 게 무척 서운했었다. 하지만 백야리에서의 하룻밤은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언젠가 러시아에 가게 되는 날, 아마도 나는 하얀 밤 속에 서서 까만 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