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부정이 망치는 것들
빗나간 부정이 망치는 것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6.02 2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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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여성인 A씨는 고등학교 다니면서 전국복싱대회에서 우승 한번, 준우승은 두 번이나 했다. 그는 이 성적을 가지고 서울 한 사립대의 수시전형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A씨는 복싱을 배운 적이 없고, 대회에 나가서도 단 1초도 경기를 치른 적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국대회에서 링에 한 번도 오르지 않고 금메달을 따는 마법을 부린 사람은 그의 아버지 B씨였다.

B씨는 체육 전문 입시학원을 운영하며 지역의 복싱협회 임원을 맡고 있었다. 그는 여자 복싱은 선수층이 얇아 대회 출전선수가 소수인 점에 착안하고, 복싱계 인맥을 활용해 딸을 대학에 보내기로 작정했다. 우승은 딸의 체급에 딸을 포함해 단 2명만 출전한 대회에서 거저 줍다시피 했다. B씨와 친분이 있던 상대 코치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신의 선수를 기권시켜 딸이 자동 우승한 것이다.

준우승을 한 두 대회는 출전자가 각각 4명과 3명이었다. 토너먼트 방식이라 두 번만 이기면 우승이다. 두 대회 모두 첫 경기에서 갑자기 상대 선수들이 감기와 고열을 이유로 기권하는 바람에 앉아서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결승에서 만난 선수들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고, 코치들은 B씨가 기권을 청탁하며 건넨 돈을 거절했다. B씨는 질 게 뻔한 딸을 기권시켰지만 두 대회에서 준우승 성적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지금 사기와 승부조작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C씨는 고등학교 다닐 때 유명 국제청소년학술대회에서 `우수 청소년학자상'을 수상했다. 이 스팩을 발판삼아 서울의 명문 사립대 특별전형에 합격했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한국창의재단의 연구과제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이 실적들을 바탕으로 지난해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했다. 그런데 C씨를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시킨 이 논문과 과제들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으로 드러났다.

대학교수인 C씨의 아버지가 작업을 벌였다. 제자인 대학원생들에게 논문을 쓰게 하고 딸의 이름을 올렸다. 한국창의재단서 뽑힌 논문은 10여명의 제자들이 동원돼 동물실험까지 수행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제자의 땀을 수탈한 아버지는 구속됐고 딸은 불구속 기소됐다.

누군가의 양심을 매수할 돈도 없고, 누군가에게 갑질을 할 백도 없는 아버지가 있다. 온 가족이 반지하 방에서 피자집 배달 상자를 접으며 생계를 유지하지만, 이 고달픈 현실을 타개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무능한 가장이다. 그는 자식들이 벌이는 사기극을 격려하고 공모하는 방식으로 부정(父情)을 발휘한다. 딸이 부잣집 가정교사가 되려는 오빠를 위해 가짜 졸업장을 만들어내자 “서울대에 문서위조학과가 있다면 수석합격 감”이라고 추켜세운다. 아들과 딸의 좌충우돌로 온 가족이 부잣집에 기생하는 데 성공하지만, 또 다른 을과의 충돌로 그는 평생을 남의 집 지하에 갇혀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자식들의 일탈에 편승해서 반지하 방을 탈출하려던 그의 시도는 더 밑바닥으로의 추락으로 종결된 것이다.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 기택씨의 사연이다.

약자의 기회와 자격까지 가로채는 갑들의 반칙이 횡행하는 세상이다. 지난 10년간 87명의 교수가 139건의 논문에 자녀를 공저자로 등재했다는 의심스러운 조사결과도 있다. 고위층의 자녀 채용청탁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영화 속 기택씨 가족의 분투를 갑들이 싹쓸이하는 불공정 사회에 대한 통쾌한 반격으로 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같은 처지의 을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찼다가 낭패를 봤을 뿐이다. 을들의 절망과 좌절보다 걱정되는 게 있다. 아버지가 과대 포장한 무능력자, 아버지의 범법을 방조한 몰양심자들이 사회의 중추로 진출해 선대의 패악을 답습하며 부패 바이러스를 확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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