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을 지켜낸 의병과 조헌선생을 기억하며
이 땅을 지켜낸 의병과 조헌선생을 기억하며
  • 박소연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장
  • 승인 2019.05.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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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소연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장
박소연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장

 

작년 여름 우리나라 안방을 휩쓸었던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는가. 조선말 일본으로부터 핍박받던 시절을 배경으로, 혼란의 시기를 특정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 싸우며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였다. 이를 통해 지금은 이름조차 남지 않은 많은 `의병'들을 주목받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임진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을미년에 의병이 되죠. 을미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극 중 조선인을 핍박하던 일본인 장교의 입을 통해 뱉어지는 저 대사에서 우리 역사 속 의병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우리 민족은 언제고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들고일어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기서 말하는 임진년은 바로 1592년, 임진왜란이다.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명분을 앞세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왔다. 전쟁에 아무 대비를 하지 않았던 조선의 관군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전국에서 내 땅, 내 고향을 지켜내고자 양반부터 노비까지 신분을 막론하고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이 중 충청도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이 중봉 조헌선생이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으며, 평소에 스승 율곡 이이의 생각처럼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서 사신을 보냈을 때, 일본이 곧 침략할 것이니 사신의 목을 베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바로 도끼를 들고 임금께 상소를 올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가 그것이다. 내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고 단호하고 강경한 상소를 올려 그만큼 확고한 뜻을 보인 것이다. 그럼에도 조헌선생의 간청은 묵살되었다.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자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가치가 없다”라는 신념 아래 의병들을 모집하여 영규대사와 함께 1000명이 넘는 의병들을 이끌며 충청지역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계속해서 일본군에 밀리기만 하던 상황에서 일본군에 빼앗겼던 청주성을 탈환하여, 내륙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을 물리친 인물도 조헌선생이다.

이후 조헌선생은 불리한 판세임에도, 전라도를 차지하려고 금산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금산으로 향하였다. “오늘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마땅히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는 조헌선생의 말에 따라 700명의 의병은 한 명도 흐트러지지 않고 모두 왜군과 싸우다 금산에서 순절하였다. 현재 이곳은 사적 105호 칠백의총으로 지정되어, 당시 조국을 위해 헌신한 영웅들을 모시고 있다.

충청북도에도 조헌 선생의 흔적을 담은 여러 문화재가 남아있다. 의병으로 나서기 전 후학을 양성하였던 옥천 이지당(충북 유형문화재 42호),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조헌전장기적비(충북 유형문화재 136호), 조헌 선생의 유해를 모신 조헌 묘소(충북 기념물 14호),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사당 후율당(충북 기념물 13호), 조헌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조헌 신도비(충북 유형 183호), 선생을 제향했던 창주서원의 묘정비(충북 기념물 105호), 선생의 영정을 모신 가산사 영정각(충북 기념물 115호) 등이다.

다가오는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스러져간 이름 모를 수많은 의병과 조헌 선생의 헌신을 기억하며 이 문화유산을 답사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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