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끈
인연의 끈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5.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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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오월의 바람이 불었다. 막 신록으로 우거진 숲에서 5월의 문에 들어서자마자 미친 듯이 불어왔다. 몸을 휘청대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갓 피워 올리는 이파리들이 심한 몸부림을 해댄다. 강샘이라도 부리는 걸까. 햇살도 바람에 눌려 주눅이 들었다. 농막에도 횡포에 이기지 못한 꽃의 시체가 눈처럼 쌓였다.

그래도 투덜대지 않고 묵묵히 비질을 하는 옆에서 오히려 보는 내가 바람을 탓해댔다. 이런 불편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이는 도통한 사람 같다. 여름의 신록을 누리기 위해서는 낙엽을 쓰는 일도, 꽃잎을 쓸어내는 일도 다 자기가 받아들여야 할 몫이라는 것이었다. 자연에만은 너그러운 낙천주의자다.

한차례 휩쓸던 바람이 제 양이 찼는지 조용해졌다. 중반에 벌써 찾아온 폭염주의보라니 변덕이 도를 넘는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볕을 피해 다니는 여름이 왔다. 날씨가 사람의 옷차림도 반소매로 바꿔 놓았다.

지금 음성에는 닷새 동안에 품바축제가 열리고 있다. 문인협회도 품바의상 체험과 추억의 교복체험인 두 개의 부스를 맡았다. 시간이 나는 회원들이 참여한다. 직장을 다닌다는 핑계로 잠깐씩 나가보면서 교복체험에서 사람들이 더 많이 웃고 즐거워하는 것을 느낀다.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품바보다 표정이 훨씬 밝았다.

교복을 입고 찡그린 표정을 짓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학생이 된 사람들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행인들도 소리 내어 웃는다. 누구에게나 잊지 않고 마음 안에 저장되어 있는 소중한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풋풋한 우정이 있고 좋은 추억으로 저마다 남아있는 시간이기에 말이다.

얼마 전에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망설이다가 받았다. 목소리가 익숙한데 그쪽에서는 자기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며 끊으려 했다. 누군지 확인하니 고등학교 때 친구인 우정이었다. 까마득한 세월인데도 목소리는 변하지 않아 금방 알아보았다. 친하게 지낸 사이로 졸업 후에 보지 못하여 잊고 지냈던 터였다.

울릉도를 가는 배 안에서 내 소식을 알게 되어 그녀는 전화했다. 나를 아는 지인이 친구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 듯해 말을 붙였다고 한다. 서로가 전혀 다른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본적이 없을 텐데 희한한 일이다.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으로 시작된 대화는 음성(蔭城)이 주제거리가 되어 내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이름이 단숨에 35년 시간으로 이어졌다. 긴 세월을 뛰어넘어 그간의 안부를 물었고 반가웠다. 우정이라는 이름도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단어이고 더구나 나 역시 뉴스에서 많이 접하기에 잊기 어려운 이름들이다. 마음속에 눌러앉아 있어 궁금했던 친구였다.

인연이 이어지려니 이런 일도 다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내가 둘의 이야기소재가 되어 추억의 끈을 잇게 해주다니 놀라운 일이다. 보이지 않는 실이 있어 서로를 이어준다는 끈. 만나야 할 사람이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법이라는, 아무리 피해가도 언젠가는 만난다는 인연설을 울릉도행 배로부터 전해왔다.

그녀와 다시 닿은 인연이다. 시절인연인 셈이다. 사람이나 일, 물건과의 만남도 그때가 있는 법이라고 한다.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바로 옆에 두고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문득 지나간 시절인연들이 그립다. 교복차림의 함박웃음을 짓는 그들을 보고 있는데도 울음이 고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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