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진 자리
꽃 진 자리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19.05.2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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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어떤 화가의 붓놀림이 이리도 훌륭할까. 어떤 조각가가 이리도 정교한 손끝으로 봄의 형상을 다듬고 있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봄은 달려가는 몸을 멈추어야만 한다. 이어지는 계절에 건네야 할 서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조금은 애처로워도 무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장성해지고, 결국은 똑같이 자연 속으로 동화되어 간다는 것을 누구나 겪지 않던가.

이제 꿈과 같았던 봄은 꼬리를 내리고 있다. 마지막 심호흡을 하는 몸짓이다. 가녀린 꽃잎들은 빛을 바라가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활짝 웃던 얼굴을 뒤로 한 채 시무룩한 모습으로 연초록에 매달리어 있다. 바람이 일어 꽃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잠깐의 영화榮華였다. 하지만 아파할 겨를도 없이 연신 그 자리에 새살을 키워가야만 한다. 바람도 잠잠하게 주변을 맴돌 뿐이다.

꽃 진 자리가 말갛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이 있었을까. 고단해 보였을 짧은 여정 속에 많은 사연이 스미어 있는 듯하다. 보이는 봄과 함께 무수히 지나간 봄이 불현듯 스쳐온다. 별 감정 없이 늘 지나치던 어느 폐가를 보면서다. 족히 두어 세대를 거쳤을 만큼 처마 끝에는 묵은 기억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무너져가는 담장과 함께 앞마당은 풀꽃들이 장악해 온 터라 고요한 평원처럼 바람도 드나들기가 수월해 보였다. 아직도 거두어 가지 않은 뒤란의 장독대는 허기를 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풍경이었다.

인생의 사계절을 보냈던 집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비록 낡아진 집이지만 내 눈에는 한 때 꽃 같은 시간이 있었으리라 기억해두고 싶다. 모두 떠난 빈집, 곧 누군가가 와서 철거장비를 들이댈 만큼 허술한 집이어도 꽃 진 자리마냥 새로운 시선이 자리를 잡고 말았다. 문득 시골에 있는 친정집이 떠올라서다. 오래전 빈집이 되었으니 바람만 주인 노릇을 하고 있을 터이다. 꽃 진 자리마냥 혼자서 마냥 몸부림할 터이다.

우리네 삶의 단면도 그러하다. 피고 지고,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이어지고, 그 가운데 내 걸음도 머물러 있다. 부모님이 떠난 자리를 물려받아 그 흐름에 실려 가다 보니 어느덧 내 자식이 가까이 따라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삶의 분량을 따라 저마다 자리를 지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과 함께 더불어 있었다.

꽃이 지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흐트러진 그림이다. 사람들도 그와 비슷해 보인다. 한 시절 꽃같이 어여쁘고 무성한 나무 같아도 시간의 흐름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제 몸을 내어주고 내려놓기 마련이 아니던가. 조금은 퇴색되어 보일지라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보며 남은 인생, 때로는 고통과 번뇌도 꽃이 지는 과정처럼 순리로 여기고자 한다.

또 다른 삶의 승화를 기다린다. 무엇이든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눈으로 바라본다면 나머지의 인생이 훨씬 수월해지리라 믿고 싶다. 그것이 꽃 진 자리에서 돋아나는 의기가 아니겠는가. 오늘도 뿌리 깊은 저곳에서부터 끌어올려 지는 수분의 힘을 공급받듯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 하는 중이다. 말갛게 꽃 진 자리를 다듬고 있다. 먼 훗날의 내 뒷모습이 흉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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