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벌 - 하늘 골목
안덕벌 - 하늘 골목
  •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 승인 2019.05.2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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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높디높은 담과 좁디좁은 길은 이웃친구네로 놀러 갈 때면 늘 통과하던 시간이 누적돼 있다. 반복되는 발길, 매번 목줄이 끊어질 듯 달려나와 짖어대는 개는 할머니 손을 잡고 마실 갈 땐 다소곳이 개집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사립문 옆으로 답싸리를 심어 마당비를 준비하던 아버지는 집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을 원했건만, 나는 친구들과 뒷산, 누에먹이는 집, 포도밭, 뽕밭을 외곽의 경계로 삼아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여럿이 몰려다니던 터라 길바닥에는 풀이 자랄 날이 없었다. 지금은 뿔뿔이 헤어져 가끔 모임에서 만나는 녀석들의 발자취가 있는 길이다.

다들 떠났는데 난 조상대대로 이 동네에 살고 있다. 변한 건 어릴 적보다 더 넓은 길, 간간이 남아있던 볏짚을 얹어 만든 대문, 양철지붕 대신 원룸이 즐비해졌다. 녹슨 철문이 신식 스텐금속문으로, 나지막한 돌담과 탱자나무울타리는 콘크리트블록의 담과 높다란 벽으로 변한 거 외에 터는 그대로다. 물론 터무니는 온데간데없지만.

길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내의 손을 잡고 어릴 적 골목길을 돌아 친구네 집 평상이 놓여 있던 곳을 찾아 나섰다. 온통 원룸 촌으로 바뀌었지만 그나마 옛날의 집 모양을 갖고 터무니가 남아 있는 곳을 발견할 때면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는 누나의 집인데 지금은 앞 건물로 이사해 오빠와 아래위 살고 있다는 대꾸도 들어가며, 동네 곳곳에 무단 투기 된 쓰레기에 불쾌감을 토로하며, 아랫터에서 오래 운영하던 문구점이 이전하며 가꿔 놓은 뜰앞에 발을 멈춘다. 큰꽃으아리가 화사하게 만개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집 앞, 한 뼘 손바닥 공간도 놀리지 않으려 여러 가지 작물을 심었다. 짙은 녹색의 튼실한 부추, 꽃을 떨구고 알알이 씨를 맺은 달래, 노란 꽃대가 올라온 쑥갓, 아마도 내년 먹거리를 위한 씨를 받으려는 것이겠지 생각하니, 얼굴도 본 적 없는 집주인의 연륜과 손이 느껴진다. 이 정도의 정성이면 아마도 오래 이 동네를 지켜온 노인분일 듯하다.

육 남매 중 넷째인 나에게 아버지는 늘 당신 곁에 남아주었으면 했고, 나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많은 일을 이겨냈다. 육 남매 중 넷째인 아버지는 큰아버지를 대신해 터를 지켰고 나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번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한 가족의 가장이 된 지금까지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다.

골목골목, 집은 온데간데없고 터무니마저 기억하기 어려운 동네이지만 많은 사람의 만면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롭게 변해가고 멋지게 그려질 새로운 터를 갈망하고 있다. 저녁나절, 땅거미가 채 가시지 않은 가끔 창문을 새어나오는 불빛의 시간을 품은 동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이 동네에 빠져 그간 멀찍이 밀어 놓았던 생각을 다시 머리에 담는다. 어쩌면 이러다 내가 어찌 될지 모르겠단 아주 몹쓸 생각마저 든다. 이러다 이 동네를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하고 이곳에 끝끝내 머무르는 것은 아닐지? 아버지에게 잘사는 아들을 보여주고자 묵묵히 이겨내고 참았던 그 간의 시간, 가족에 대한 소홀함에서 오는 미안함이 온통 이 동네에 묻어 있다.

이제 할 만큼 한 것이지? 쉼 없이 달렸지? 왜 끝이 이런 거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이 시간이 가장 비참해진다. 올 한해 겨울이라 했건만 이리도 시릴 줄이야? 어느새 파르스름한 기운이 창을 채운다. 등을 돌려 물끄러미 하늘을 본다. 옅은 구름 뒤의 하늘이지만, 건물 사이사이, 골목골목 사이의 넓은 또 다른 하늘을 본다. 하늘에서 이 동네는 티끌 정도나 될까? 이 동네의 좁디좁은 골목길은 터럭 정도는 될까? 그 안에 나란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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