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나무 같은 영화
종려나무 같은 영화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2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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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봉준호 감독이 영화의 도시 칸에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낭보가 전해진 날. 나는 내 방 책꽂이 맨 위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아놀드 하우저(A.Hauser)의 4권짜리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다시 꺼내들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촘촘하고 빼곡하게 편집된 작은 글자들이 눈을 어지럽히는데, 20대 푸른 청년 시절 밑줄을 그어놓은 결기가 새삼스럽다. A.하우저는 영화를 `대중문화의 특징적 산물'이라고 단정했다.

“영화와 다른 예술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즉 영화에서는 공간이 시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시간은 또 어느 정도 공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라는 문장에 그어진 밑줄 역시 빛이 바랬으나 더 뚜렷하다.

나는 봉준호가 받고, 감격스럽게 닦아내던 황금종려상 트로피에서 또 다른 인간세상을 본다.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를 환호하던 수많은 무리가 성전이라는 공간을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불과 나흘 만에 저버리면서 예수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33년의 인간 생애를 끝내게 된 것은 수요일이었다.

물론 나 또한 봉준호 감독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기생충>을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그 영화가 가난이 지극한 반지하 `공간'과 과외라는 불편한 형식을 차용한 부잣집 `공간'에 대한 잠입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을 뿐이다.

`가난과 불안', 그리고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은 물론 갈수록 지겨워지는 타락한 자본주의적 `신분과 계급의 차이' 등은 영화 <기생충>에 대한 찬사에 어김없이 뒤따라오는 묵직한 형용들이다.

종려나무가 성전이라는 성스러운 공간과 치환되는 2000년 전 인간의 탐욕과, 가난의 굴레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하도록 모질기 그지없이 함부로 사람을 다루는 지금의 가진 자들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런 면에서 호모 사피엔스들은 2000년이 지나는 동안 진화는 엄두도 없이 오히려 타락 지향성으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A,하우저의 말이다.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 참된 예술 이해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 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 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데 있다.” 이 소중한 문장은 단지 대중예술의 특징적 산물로서의 영화가 아니더라도 옳고 그름, 그리고 나눔과 어울림은 물론 소수의 독점적 지배와 다수의 억압에 저항하는 양심의 건전성을 키워나가야 하는 봉준호식 영화의 해법으로 충분히 풀이가 가능하다.

나는 봉준호 감독이 지금까지 연출해 개봉한 상업영화를 한 편도 빠짐없이 모두 `극장'에서 보았다. 2000년 2월 개봉한 첫 상업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사면초가의 입장에서 위태롭기 그지없는 지금 시대 시간강사의 처지를 예견한 듯 신기하다. <살인의 추억>(2003년)은 풀어내지 못한 범죄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괴물>(2006년)에서 발휘된 한강에 살고 있는 괴물에 대한 상상력에는 용산에 미군기지를 두고 살아야 하는 한반도의 처지와 환경오염을 자극한다.

<마더>(2009년)를 통해 범죄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처절한 모성애와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화두가 난해하고, 인류의 종말을 시사하는 <설국열차>(2017년)에서는 극한상황에서도 멈추지 않는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고발한다. 그리고 <옥자>(2017년)에서는 유전자 변형과 육식에의 탐욕을 고발하면서 봉준호의 영화들은 사회성과 밀접하고 끈끈하게 유지하는 연결고리를 놓지 않고 있다.

영화가 반드시 교조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는 봉준호의 영화들이 평단이나 대중에게 두루 호평을 받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모든 진리는 일종의 현실성을 지닐 뿐”이라는 A.하우저의 말은 봉준화 영화와 통로가 같다.

종려나무는 추운 지방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봉준호가 가져 온 황금 종려나무가 세상을 따뜻하게 해 줄 것으로 믿는 한국영화 100년의 해.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람이다. 영화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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