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리감 도대체 뭣꼬
이 거리감 도대체 뭣꼬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5.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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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5월은 풋풋한 초록과 영롱한 꽃들이 너와 나 사이에서 춤추게 한다. 자연은 우리를 선(善)하게 살라고 최대한의 빛을 내기 위해 온도를 높이는 중이다. 우주적 시공간의 질서와는 달리 물리적 시공간이 주는 5월은 우리를 덜커덩거리게 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처님 오신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크고 작은 일들로 달력에 그려놓은 동그라미는 빙글빙글 돌며 서커스를 한다.

양가 어머님과 세 자녀 사이에 있는 나는 어버이날이 되면 고민에 빠진다. 세월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시댁을 생각하면 어지럽다.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답” 없음은 여전히 제자리를 고집한다.

연휴라 타지에 있는 두 아들이 집에 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님이 계신 요양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평상시에 잘 따라나서지 않던 아이들이 말없이 동행한다. 사실 나도 요양원에 가는 것을 꺼린다. 처음에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 울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몇 년째 요양원 신세를 지는 병실의 풍경을 지워버리려고 애쓴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노년의 삶이기에 겸허히 받아들이려고 체면도 걸어보지만, 한계를 느낀다. 병원 풍경을 보면 어머님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되레 앞으로 닥칠 나의 미래가 불안하다. 누구에게나 거쳐가야 할 노년의 시간, 병실의 풍경은 참으로 참담하다.

병실에 계시는 분들 대부분은 거동이 불편하다. 여섯 분 중 두 분은 허리와 다리를 못 써서 침대만 올렸다 내렸다 하는 신세요, 다른 두 분은 몇 년째 검푸른 얼굴에 코에 호수를 꽂고 산송장으로 누워 있다. 처음엔 눈인사도 하고 입에다 먹을 것을 넣어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거의 외면하다시피 한다. 그나마 치매로 정신이 들락날락하시는 어머님과 요양 차 오신 분은 움직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이번에 찾아뵐 때 어머님은 아주 건강해 보였다. 예전에 기세 당당했을 때 모습이 스쳐 간다. 이 병원에서 얼른 나가야 농사를 지을 텐데 하신다. 아이들과 애들 아빠는 인사만 하고 밖에서 왔다갔다한다. 이 공간에 있는 나는 뭣꼬?

요양원 갔다 오는 길은 침묵의 시간이다. 다음 날 친정엄마에게 전화했다.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했더니 예전에 다니던 절에 다녀오고 싶다고 한다. 경사가 심하고 깊은 산중이라 자동차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초파일을 며칠 앞둔 터라 바람 쐴 겸 다녀오자고 했다. 엄마는 암자로 가는 길이 마치 천당으로 향하는 길인 양 마냥 행복해하신다. 엄마가 변변찮은 작은 암자를 찾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젊은 날 아버지의 잦은 부재는 엄마에게는 지옥이었을 게다. 그것도 6년 동안 아이가 없었으니 얼마나 서러웠을까?

여자로서 죄인이라고 생각한 엄마는 거의 매일 30리 길을 걸어서 첩첩산중 작은 암자를 찾아 가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결혼 6년 만에 얻은 첫아이가 나다. 나를 시작으로 줄줄이 사 남매를 뒀다. 우리 사남매는 엄마의 유일한 재산이자 희망이다. 사남매는 이 암자에서 준 크나큰 은혜이니 찾아가고 싶었던 게다. 소백산을 등에 업고 태백산과 청량산, 주왕산이 내다보이는 일출봉 아래 자리한 암자에 가는 것이 나도 싫지 않다.

어버이날 아들 둘은 말없이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왠지 서운한 마음에 전화했더니 전화를 받자마자 “마덜, 마덜 축하해~ 수업이 꽉 차 있어서 연락 못 했어. 미안, 미안” 하며 숨이 넘어간다. “그거 말고 뭐 없니?”했더니 “며칠 얼굴 많이 봤잖아” 한다. 그럼 오늘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으니 엄청 열심히 살았단다. “그럼 됐어” 하고 전화를 끊었다. 스승의 날, 물 건너 멀리 사는 딸로부터 “엄마 아빠는 나의 스승이야.” 하며 선물과 꽃이 배달되었다. 이 야릇한 기분, 이거 도대체 뭣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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