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에 내리는 눈꽃의 앙상블
오월에 내리는 눈꽃의 앙상블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9.05.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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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눈밭이다. 한 움큼 집어들어 입김을 호 불어도 좀처럼 녹지도 않는 눈, 산길에 하얗게 뿌려놓고도 모자란 듯 앙탈하듯 좁은 오솔길마저 삼켜 버렸다. 햇볕을 이고 산자락에 펼쳐진 하얀 눈을 밟고 언덕바지에 오르려니 오월임에도 괴춤이 축축하게 땀이 오른다. 허리만큼 구부러져 좀처럼 펴지지 않은 마음을 내려놓았다. 물을 마셔도 가시지 않은 갈증은 바싹바싹 입이 더 마른다. 이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발아래 움푹 들어간 골짜기마다 찔레꽃 눈꽃이 하얗게 내려 수북이 쌓여 있는 오월이면 야산을 찾는다.

강산이 한 번 변한 긴 세월, 산자락에 하얗게 찔레꽃이 만발하였고 어머니의 사십구재 날에도 하얗게 눈꽃이 내렸다. 농부의 아내였던 어머니, 농사일보다 바깥일이 더 바빴던 아버지 때문에 홀로 전답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어머니셨다. 들녘에는 모심기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부터 병원출입이 잦았던 어머니, 점점 홀쭉해지고 움푹 꺼진 볼, 푸석푸석하고 피곤하게 내려앉은 눈꺼풀과 거칠한 얼굴로 변해버린 어머닌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벼 이삭이 누렇게 익을 무렵이면 뚝뚝 떨고 일어나시겠지 하는 바람은 허망하게도 빗나가고 좀처럼 일어나시질 못하셨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겨울부터 몇 차례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몇 번,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매년 눈꽃이 하얗게 떨어지고 또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툭툭 털고 일어날 것 같았는데 끝내 자리에 몸져누우셨다. 몸속에서는 몹쓸 세포가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시든 꽃잎처럼 점점 기력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이 떨어지듯 여름이 오기도전에 생의 끈을 놓아버린 세월이 십 년을 훌쩍 넘어섰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하고 먹먹하다. 오월 산자락엔 어찌나 눈꽃이 많이도 내리는지 찔레꽃 필 때면 언제나 그때 그 기억 속에 머물고 있다.

생전 어머닌 구전으로 내려오는 찔레꽃이야기를 가끔 들러주셨다. 찔레꽃이 필 때면 절대 시집간 딸네 집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맘때쯤이면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이제 막 이삭이 패기 시작하니 보리수확 할 때까지 배를 주려야 했던 시기기 때문이었다. 농업이 주였던 옛날엔 일 년 중 모심는 철이 가장 힘들었던 보릿고개, 그 힘든 시기가 찔레꽃 피는 시기였던 것이다. 시집간 딸은 친정 부모님이 찾아오시면 기쁨 이면엔 고심이 더 많았던 시절이다. 언감생심 진수성찬은 꿈도 못 꾸고, 번듯한 밥상을 차려내기가 어려웠기에. 문헌에 의하면 찔레란 이름은 `가시가 찌른다.'라는 뜻에서 온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아프고도 슬픈 사연을 간직한 찔레꽃, 부모의 아린 마음이 담긴 이런저런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찔레꽃이 만발한 산모롱이를 돌아 어머니산소에 털썩 주저앉았다. 산소둘레 붉게 피었던 영산홍들 빛바랜 기억처럼 시들시들 시들어 희끗희끗 얼룩져 볼품없이 고개 숙이고 찔레꽃이 서럽게 떨어지는 오월이 요즘엔 외려 정감이 간다. 그때는 찔레꽃이야기가 어머니의 어지럽고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것 같아 외면하고 싶었는데, 내가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보니 이젠 그 이야기마저 그리운 건 찔레꽃의 고독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란 꽃말 때문만은 아닐 게다. 그렇게 하얗게 피는 찔레꽃, 그리움이 떨어진 자리에 찔레꽃이 피어난다고 오늘만은 난 믿고 싶다. 먼발치,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어느 가수의 `찔레꽃'노래가 서럽고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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