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전사(戰士)의 영혼이 잠든 곳, 신봉동고분
백제 전사(戰士)의 영혼이 잠든 곳, 신봉동고분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05.1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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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82년 3월 21일 차용걸 교수(충북대 명예교수) 일행은 청주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 서쪽의 구릉지대에서 고대 성터를 조사하던 중 우연히 도굴로 파괴된 백제 움무덤[土壙墓]과 돌방무덤[石室墳]을 발견했다. 백제시대 최대규모의 움무덤유적으로 평가받는 청주 신봉동유적(사적 제319호)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이다. 37년 전 봄날 일요일 오후였다.

이로부터 2013년까지 신봉동유적은 모두 7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과정에서 1982년 첫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많은 도굴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무덤이 훼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움무덤 내부에 벌집처럼 남아 있는 도굴흔적과 훼손되어 흩어져 뒹구는 수많은 토기편들은 잔혹한 유적파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수십 년간 도굴행위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씁쓸한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발굴결과 움무덤 326기, 돌덧널무덤[石槨墓] 3기, 돌방무덤 4기, 구덩[竪穴]유구 30기 등 363기의 유구와 2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도굴됐으나 예상보다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닌 유물들을 수없이 쏟아낸 것이다. 이러한 발굴결과는 백제사를 다시 쓸 정도로 획기적이며, 4~5세기 백제의 생활문화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백제고고학의 보고로서 신봉동유적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무덤은 해발 100m의 완만한 구릉의 낮은 곳부터 널무덤-돌덧널무덤-돌방무덤 순으로 구릉 하단부에서 정상부로 옮겨가며 조성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무덤의 규모와 부장유물로 보아 계층별 위계질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묘제는 재지적 성격의 움무덤이 사용되어 오다가 백제 중앙의 묘제인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이들 무덤은 상대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은 구릉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고, 부장유물의 질 양면에서 상대적으로 뛰어나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신분적 계층별로 묘역이 구분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봉동유적에서는 토기, 철기, 옥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토기는 짧은 목 항아리, 손잡이잔, 바리 등 마한의 전통이 남아있는 재지적 성격의 토기와 함께 입 큰 단지, 뚜껑접시, 세발접시 등 새로이 한성백제 중앙의 영향을 받은 것, 가야나 왜 등 외래적인 요소를 보이는 토기 등 다양하다. 이들 토기는 실생활에 사용되다가 무덤에 껴묻거리로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 중 특징적인 것은 손잡이 달린 잔[把杯]이다. 곡식 등의 양을 재는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봉동의 특징적인 토기이다.

철기유물로는 둥근고리자루칼과 창, 화살촉 등 무기류와 재갈, 발걸이 등 마구류가 다량 출토되었고, 도끼, 낫 등 농공구류도 출토됐다. 이 중 마구류와 철제무기 등 군사관련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무덤 축조집단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유적에서 출토된 다량의 체계화된 무기류와 마구류 등을 볼 때 신봉동 고분 축조집단은 군사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며, 규모 또한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용맹한 백제 전사들의 영혼이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것이다.

신봉동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에 맞서 신라와 가야 및 왜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던 때이다. 출토된 토기, 철기유물에서 백제의 상황과 이들 나라와 교류한 외교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무덤군의 규모와 출토유물의 질과 양적인 면에서 백제사 연구의 보물창고와 같은 중요한 유적이 신봉동유적이다. 근래 신봉동유적과 구릉으로 이어지는 봉명동, 송절동유적에서 조사 확보된 풍부한 고고학자료를 여러 학문분야와 학제간 연구를 진행하면 무심천을 배경으로 성장하고 발전한 이 지역 백제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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