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꽃과 선인장
종이꽃과 선인장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9.05.1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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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반장이 달려와 다급함을 누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가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좀 많이 다쳐서 와보셔야 할 것 같다고. 부축을 받아서 약품을 가진 내게로 올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는가? 두말도 하지 않고 비상약이 든 가방을 둘러메고 뛰었다. 반장이 앞서며 내 발길을 이끈다. 327호 방으로 들어가니 빙 둘러 서 있던 아이들이 옆으로 피하며 길을 내준다. 소파에 걸터앉은 유나는 말간 얼굴로 말없이 쳐다본다. 무릎의 시뻘건 상처가 생각보다 넓다. 상처의 깊이도 불규칙해서 내가 가진 약품으로는 상처를 더 헤집어 놓기만 할 것 같았다. 체험학습 사고 처리 매뉴얼을 따질 사이도 없이 응급 치료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프런트로 내려가서 숙소 책임자를 찾았다. 그런데 숙소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인근의 병원을 알려 줄 테니 택시를 부르거나 119를 불러서 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부장님께만 간단히 보고하고, 유나가 있는 방으로 다시 뛰었다. 응급처치든 병원 진료든 차분히 결정하고 진행해야 한다.

아이들로 부산한 복도를 헤집고 뛰는데, 파발이 닿듯 내가 다시 나타났음이 전해지는 소리가 먼저 달린다. 내가 뛰어들어가는 속도에 맞추어 방 안 가득한 아이들이 갈라지며 길을 열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길이 닫히고 시커멓게 좁아졌다. 무슨 노랫소리가 들렸던가?

“분장 진짜 같죠?”

“선생님, 저희 연기 정말 잘하죠?”

상처는 이번 체험학습 과정에서 특수 분장을 배운 혜원이의 작품이었다. 유나가 실제 다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내 방으로 돌아와 벽에 기대앉아 턱 아래까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까지 한참 걸렸다. 하나로 똘똘 뭉친 개구쟁이들의 연기에 나는 제대로 속았다. 숨을 고르며 카네이션과 사랑의 메시지가 담긴 상자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했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져, 스승의 날마다 아이들의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를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하나하나 기억에 남아 있지만, 첫 담임으로서 맞이한 스승의 날은 좀 더 특별했다. 쑥스럽게 맞이하는 첫 스승의 날 전날, `나는 꽃을 싫어한다, 뿌리 없는 생명은 슬프다, 선물도 안 된다.'고 종례를 했다.

다음날, 스승의 날, 감동적이게도 나는 정말로 살아있는 꽃을 받지 못했다. 막대풍선으로 만든 꽃, 색종이로 만든 꽃들을 받았다. 그리고 반 아이들 하나하나의 사진을 넣어 반장이 직접 만든 앨범과 모두가 쓴 편지를 받았다. 당시는 아날로그 사진이다. 각자에게 한 장밖에 없는 소중한 사진일 터이다. 학급 아이들이 며칠 전부터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내고 준비를 했을 터였다.

그 중 지금껏 미소 짓게 하는 선물은 경화의 선인장이다. 손가락만 한 작은 화분에 강낭콩만 한 선인장이 들어 있었다. 경화는 이것은 꽃도 아니고 뿌리도 있고 천 원밖에 안 하는 거라고 설명하며 안절부절못하였다. 교탁 바로 앞자리에서 선생님이 과연 받아주실지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리던 커다란 눈망울이 지금까지도 별처럼 반짝인다.

지금쯤 불혹에 닿았을 그 소녀들에게 내가 그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틈틈이 되새기며 교사로서 힘을 얻어왔다는 감사의 말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자, 만우절에 이어서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아주 깜찍한 이벤트로 담임을 놀라게 하는 데 성공한 반 아이들의 끼에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젊은 재치와 단합된 마음, 그것이 가장 크고 좋은 선물이다. 그래도 다음엔 당황스럽도록 행복한 이벤트를 기대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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