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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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9.05.1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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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우주라고 하면 모든 것의 집합인 그야말로 전부다. 우주 밖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 밖에 무엇이 있다면 그것도 포함해 `우주'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주는 전부이고 전부이기 때문에 하나뿐이어야 한다.

그렇다. 우주는 하나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고, 통신도 불가능하고, 어떤 방법으로도 관찰이 불가능한 우주가 있다면 그것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있다는 가정을 할 수는 있지 않을까? 더구나 그런 가정이 과학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다면 그런 상상을 해 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 재미있는 생각 놀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사물을 관찰하기 전에는 그 사물이 다중적인 상태로 중첩되어 있다가 관찰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현실화된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고 어떤 대학 무슨 과에 지망할 것인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자. 수험생인 나의 미래는 다양한 것이 중첩된 상태가 될 것이다. 나의 미래는 물리학자가 될지, 화학자가 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실패자가 될지 다양한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물리학과를 선택하는 순간, 수많은 나의 미래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오직 물리학자의 길만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다면 내가 물리학과를 선택하기 전에 화학과를 선택할까 말까 하다가 만약 화학과를 선택했다면 나의 미래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화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물리학과를 선택했고 화학자라는 나의 미래는 사라져 버렸다. 내가 물리학과를 선택하기 전에는 물리학자라는 미래와 화학자라는 미래는 동일한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어쩌다가 물리학과를 선택했기 때문에 화학자로서의 권재술은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때, 물리학과를 선택한 권재술과 화학과를 선택한 권재술이 다 있었는데 이 세상은 물리학과를 선택한 권재술의 우주이고, 화학과를 선택한 권재술의 우주는 이 우주와는 다른 우주라고 말이다. 그때 화학과를 선택한 권재술의 우주가 실제로 존재했지만 우리는 그 우주를 알 수도, 접근할 수도, 통신을 할 수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면 화학자인 권재술이 사는 우주에서 권재술은 화학자로서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우주에서 물리학자로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황당한 얘기 같지만 그런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화학자 권재술의 우주만 있을까? 생물학자 권재술인 우주도 있고, 천문학자 권재술의 우주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 살인자 권재술의 우주도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하게 되므로 매 순간 수많은 우주가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선택이 우주를 하나 만들어내는 셈이다. 그 수많은(무한히 많은) 우주는 서로 통신도 되지 않고, 서로 다른 우주가 존재하는 것도 전혀 모르면서 서로 완전히 고립되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발상으로 소설을 쓰면 재미있을지 모른다. 고등학교까지는 하나의 권재술이다가 대학에 가면서, 물리학자 권재술과 화학자 권재술이 다른 우주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고, 극적으로 마지막에 서로 만나 권재술과 권재술이 악수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소설, 어떤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고 해도 이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냉정한 과학자들이 코미디언들도 넘볼 수 없을 황당한 상상을 하게 되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또 다른 내가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다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너는 누구냐?”라고 묻고 싶다. 다중우주론, 재미있는 상상이다. 하지만, 그냥 상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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