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반점
경화반점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1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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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아이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술이며 턱에 시커멓게 짜장이 묻은 줄도 모르고 서투른 젓가락질로 면발을 먹는데 열중한다.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줄 안다면 이미 어린아이가 아닐 터이다. 이 때 옆에서 지켜보는 어른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나는 알아냈다. 우선, 짜장면을 정신없이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의 이마를 쥐어박거나 비겁하게 팔을 꼬집는 어른들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휴지를 들고 아이가 짜장면을 흘릴 때마다 정성을 다해 입가를 닦아주는 어른들도 있다.

여러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집에 갔을 때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는 이 두 가지 반응이 모두 못마땅하다. 나 같으면 아이들이 짜장면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휴지를 조용히 아이의 손에 건네줄 텐데 말이다.“

경화반점에서 모임을 마치고 나오면서 2000년 3월 초판이 발간된 안도현의 어른들이 읽는 동화 <짜장면>이 생각났다.

아직 5월이 반이나 남아 있으니, 어쩌면 경화반점을 다시 찾아 짜장면, 그것도 곱빼기를 한 그릇 시켜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토록 눈부시고 눈물 나는 사연이 많은 5월이 지나면 시내에 있는 경화반점은 다시 찾아올 수 없다.

청주의 대표적 노포(鋪) 가운데 하나인 경화반점이 결국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화반점이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교외생활지도 선생님께 들킬 것을 조바심 내며 참고서 값을 속여서 획득한 돈으로 몰래 먹던 짜장면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니 벌써 40여년은 훌쩍 넘겼을 터.

경화반점은 말하자면 시내를 추억하는 어른들의 장소였다. 시내버스 타기 편하고, 시내 중심에 있어 택지개발로 팽창된 도시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거리로, 탕수육에 소주나 고량주를 한 잔 걸치고 짜장면 한 그릇을 배불리 먹더라도 귀갓길의 부담이 덜하다.

다니던 신문사가 자본과 공작의 서슬에 신음할 때, 선·후배가 함께 모여 소주잔을 목구멍 깊숙이 털어 넣고 울분을 토하던 경화반점. 그곳에서 우리는 거대자본과 안기부 출신 사장의 임명에 저항하면서도 결국 하나둘씩 힘없이 펜을 놓아야 했던 무기력을 서글퍼 했다.

그리고 짜장면을 굳이 `자장면'으로 고쳐야 하는 신문사 교열부의 고집과 안간힘, 결국엔 교열부라는 부서가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신문 역사의 질곡을, 현장에서 쫓겨난 몸과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 후로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20여년을 넘기는 세월을 매달 한 차례씩 모여 세상을 걱정했고, 정론직필의 지울 수 없는 격정을 서로서로 위로했으니, 경화반점은 그 소중한 시간을 오롯이 우리와 함께 했다.

주인이 화교인 경화반점은 우리에게 대만이라는 섬나라와 대륙 중국의 아련함을 엿볼 수 있는 통로였고, 그들과 어우러져 살며 이념의 집요함과 그로 인해 빚어진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조금은 실감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런 경화반점은 어쩌면 우리가 일찌감치 단일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대신 화교학교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폐교되는 역사를 간접적으로 지켜만 봐야 하는 망명의 서러움과 받아들여 함께 사는 평화의 반면교사이기도 했다.

짜장면을 비롯해 기름지고 향기로운 각종 중국요리를 만들어 팔던 경화반점은 이제 아래층을 몽땅 세를 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서비스업의 일종인 외식업에서 노동의 가치를 슬그머니 내려놓는 임대업으로 변하는 셈인데, 그 사이 찾아갈 곳 한 군데를 잃어버린 서민의 추억도 주머니 사정만큼 얇아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월은 “어떤 글을 쓰더라도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하지는 않을 작정”이던 안도현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짜장면'이 자연스러운 시대로 변했다. 시 외곽으로 옮겨간 경화반점을 찾는 일은 아무래도 어색할 것이다. 노무현을 추억하고 흠모하거나, 광주의 피와 눈물을 서러워하지 않는 5월은 당연히 더욱 낯설고 어색한 일이다.

그나저나 긴 세월 함께 한 경화반점 종업원들은 그냥 쫓겨나는 것인가. 퇴직금은 당연히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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